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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산골아이들에겐 봄이 달다가 쓰다가그러다가 꼴딱 해 넘어가면 파김치 된다 산에서 놀다가, 진달래 피는 산에서 놀다가망연히 먼 곳 바라보는바보의 눈길로 자꾸 멀어지는햇빛 쨍쨍한 날에 계집아이가 오줌을 누면놀던 것 집어던지고 아이들은 쪼르륵 머리를 나란히 하고계집아이가 치마를 걷어올린 그곳을 바라보았다이브의 그곳엔 진달래 꽃잎이 막 피어났다턱 받치고 바라보다 쏴아,진달래 꽃잎이 활짝 열리는 순간까르르 까닭 모를 아이들의 웃음이 산비탈을 구르고오줌을 누는 계집아이의 웃음도 덩달아 구르고바보의 눈길로 자꾸 멀어지는 언덕엔쨍쨍한 햇빛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2.0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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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인생길은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내 인생은 얼마나 더 걸으면 몸에 익을까 들판의 나풀거리는 풀은 가을이면 흔적 없이사라지더니 봄이면 말발굽소리처럼 살아난다너는 생의 반란을 한 번이라도 주도한 적 있느냐진천 유곡 고향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는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벌써 사십 여 번을 열매 맺었다너는 배고픈 영혼을 위하여따끈한 밥 한 상 내어놓은 적 있느냐 삶은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사는 것인데도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하기만 하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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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인생이란 짐을 내려놓는 것이아니라 짐을 지는 것이다 바람 속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나도 어쩌면 꽃이 될 수 있다는엉뚱한 생각으로 몇 날은 행복했다흔들리면서 일어선 건 다 꽃이 되는 줄알았는데 내게는 향기가 없었다어느 날부터 너의 짐을 덜어내가 지고 싶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짐을 지니 그만큼의 하늘이 열리더니삶의 지평이 휘청,맑은 웃음에 빠졌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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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사랑은 교통사고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우연한 시간에 정면으로 달려든다충돌을 피하려 핸들을 트는 순간안정된 풍경이 회오리치고아찔한 충격에 멍해진다이미 차선을 벗어났다 사랑은 목마르다 흐르는피는 수혈을 기다린다그의 피가 그립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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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詩作) 시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날이 있다 까치발로 바라보는 담장 너머 세상이겨우겨우 보이듯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욕을 만드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시를 쓰지만 좀처럼 낯익지 않는다 소를 채찍으로 몰고 있음을 발견한다어느 날부터 소의 고삐를 놓고길어진 여름해를 즐기며 걷는다성큼성큼 소를 따라 걷다보면어느 새 소는 집에 다다르고 문밖까지나와 시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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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에 묻어라 죄를 지어 종신형을 받은 사람이형무소에서 죽거든갈대밭에 묻어야 하리라 형무소 안벽에 핀 민들레꽃도홀씨를 날려 담을 넘는데사람으로 태어나평생을 갇혀 살다 죽은 사람은갈대밭에 묻어야 하리라 바람 끝에 묻어온 방랑의 피에 젖어보라고그의 이름이 나와 같은 사람이었으니그의 가슴이 나와 같은 사람이었으니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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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산에 오르니 바람이설핏 한 마디 던지고 간다무엇을 얻으려 올라 왔느냐너도 곧 바람일 텐데머쓱한 어깨에 내려앉는 말보다의미가 더 차다 산을 걸어 내려오다바람밭에 내 등뼈 곧게 세우고그 끝에 웃음을 한 장 건다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이도록세상이 나를 크게 흔들수록웃음이 더 펄럭이도록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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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빛깔 사람의 욕망에서는 썩은 냄새가나지만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한들풀의 욕망에서는 향기가 난다욕망이 파란 풀이여욕망이 향기로운 풀이여 사람은 향기가 없지만웃음에서는 풀냄새가 난다썩은 나뭇잎에 뿌리내린들풀의 상처에서 초록빛 피가 흐르듯사랑을 배운 웃음은 풀빛처럼 순하다웃음의 빛깔은 초록빛이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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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반란 내 몸에는 너에게로 가고 싶어 반란을 일으킨 피가 있다. 내 안에선 나보다 너를 사랑하는 세포가 더 많다. 너를 그리워하는 세포들이 불어 하루가 다르게 점령지를 넓혀가고 있다. 자존의 갈기를 세우고 척추를 세워 반란을 제압하려 일어서는 순간 내 운명을 한 바퀴 감던 나이테가 휘청, 너에게로 기운다. 내 안에선 너에게로 달려가는 세포들로 찰랑찰랑하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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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바글바글 끓는 된장이 유난히 구수한 날이 있다그 냄새가 가슴을 툭툭 치는 날은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 따끈따끈한 찻잔을 마시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면찻잔 속에 가득하던 너의 얼굴이 눈물로 부서지고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 하얀 쌀밥에 김치를 손으로 쩍쩍 찢어 얹어 먹을 때너의 하얀 웃음이 내 앞에 있는 듯하면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나쁜 사람아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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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를 느낄 수 있는실핏줄 하나 더 생겨간지러워라간지러워라 하루치의 그리움만큼씩간지럽게 간지럽게사랑은 닮아 가는 거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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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프단다 사람은 아프단다하늘만 파래도 아프단다냉이꽃이 피어도 아프단다달래꽃이 피어도 아프단다 논두렁길 따라봄이 오면 아프고밭두렁길 따라비가 와도 아프고 꽃이 필 때는 꽃도 앓는단다사람이 몸살 앓듯이 앓는단다사람도 그렇게사는 것만으로도 아프단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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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내게 전한 말 같은 날을 사는 것이 인생인데 굳이 살아온 날들과다르지 않은 세상을더 살아야 하냐고 물으면말문이 막히지만, 한 여름날냉수 한 사발 같은 웃음을퍼 올릴 수 있는 것이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오늘 하루도눈물겹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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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커피는 막 발목을 담군 가을을 닮았다낙엽 타는 냄새를 닮아 싸하고빛깔은 흑갈색의 아문 상처를 닮았다마시면 달콤한 추억이 살짝 넘친다조금 남은 쌉싸롬한 뒷맛이밀린 일이 남았다며 일어서란다이만큼이나 살아내고서야 알게 된다그래, 바로 커피맛 같은 것이었다 달면서 쓰고 그러면서 중독되는 맛사는 것도 중독되는 거였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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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오늘 내가 살아있음으로지구에서는 축제가 시작된다내가 살아있는 것 이상의 축제는 없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깝다어둠을 베어내고 찾아오는 새벽에서는푸른 식물이 자라는 냄새가 난다그 냄새에는 성장통이 있다성장통은 천국에 가까워지는푸른 꿈을 꾸는 나무의 향기다 인생이 지루한 건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살아있음을 부르르 떨어라생이 지루하면 죽어버려라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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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종이에 담긴 어느 밀림의 전설 백지에는 한때 밀림의 하늘로쑥쑥 자라던 시간과똘똘똘 흐르는 물소리와나뭇잎을 흔들던 바람소리가 들어있다 지난여름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을말끔히 지운 백사장처럼백지는 나이테가 가졌던나무의 성장기억을 상실했다숲의 기억을 상실한백지를 보면 시인도 길을 잃는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1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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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살아있음이 행복한 날은 저무는하늘에 웃음을 걸어도 좋아라 민들레꽃 진 자리, 동그란 씨방여린 꽃대를 올려동그란 하늘을 열었다 날숨 한번 쉬어도 몸을 헐어날아가 버리는 홀씨,가벼움으로 아름다움을 전하라 민들레 홀씨 날리는 날은그대의 하늘에 웃음을 걸어라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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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사랑 달팽이의 느린 걸음이시간을 걸음마 시키고 있다 시간을 더디게 끌고 가는 힘이달팽이에게는 있다 생의 전부를 짊어진달팽이는 사랑에도 생의 전부를 건다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집에는 사랑만있고 사랑이 아닌 것은 어느 것도 없다달팽이는 투명한 촉수로 낮아진 하늘을더듬어 꿈틀거리는 사랑을 잡는다달팽이는 이 세상의 시간을같은 속도로 이해하는달팽이를 사랑하고 있다 달팽이는 짧은 사랑도길게 늘려 놓는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0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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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종소리 인연에서는 푸른 종소리가 난다.식물성의 푸른 종소리가 난다. 뎅그렁, 뎅그렁.한 사람의 생을 허물며 파고드는 푸른 종소리. 너의 종소리에 파르라니 떠는 내 심장이 아프다. 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너의 거센 파동에 가늘게 떨다 마침내 함께 우는 공명의 종소리, 운명의 냄새가 난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운명의 푸른 종소리가 울린다.벌판에서 만난 소나기와 같아 피할 수 없다.아, 사랑을 배워 행복하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0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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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코너로 ‘시와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들었습니다.매일 1편의 주옥같은 시를 올리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배 사랑으로삶을 건너는 배를 띄운다사랑 이외엔아무 것도 싣지 않았다 자, 이제 출발이다.
시와 차 한 잔
hkbc 문화부 작가
2018.11.06 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