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순옹주 홍문으로 가는길

화순옹주는 영조가 가장 사랑한 딸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행히도 오래살지는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남편인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열녀의 이야기 같지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던 화순옹주는 친언니 나 효장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사람이다.

어디에 정을 둘곳이 없었던 화순옹주는 그나마 사도세자와 친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12살의 나이에 동갑내기인 열성위 김한신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나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혀서 죽게 되고 자식도 없었는데 월성위 김한신이 39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니 더이상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 화순옹주 홍문비

화순옹주 사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조카인 정조가 1783년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며 월성위 부부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 열녀문을 세운 것이고 홍문을 세우며 칭송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 화순옹주 홍문에 대한 안내

화순옹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도 여자가 자식을 못낳는다면 눈치를 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는 칠거죄악 이라하여 더 큰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식을 먼저 보내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조 또한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자 찾아와 미음이라도 먹으라고 권했지만 끝까지 먹지 않았다고한다.

그때 영조가 화가나 열녀문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라했다. 열녀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건물이 있었던 것인지 기초석 같아 보이는 것만 남아 있다. 

▲ 대문 틈새로 본 화순옹주 건물터

영조가 사랑했지만 다른 혈육이 없으니 의지할 곳도 없고 남편도 없어진 마당에 세상삶에 대한 인연이 의미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한겨울이라서 앙상한 나무만이 그녀의 과거 기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요즘에 눈이 많이 내리고 어제는 전라북도를 갈일이 있어서 갔다가 차가 미끄러지는 통에 조금 힘들었다.

이곳에 월성위 김한신과 그의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혀 있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로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월성위에 봉해졌다.

▲ 월성위 김한신의 묘

부마가 되었던 김한신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귀한 신분이지만 평소에도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무덤위에 눈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고 화순옹주 홍문 바로 옆에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화순옹주 홍문에는 정조가 하사한 열녀 정려문이나 내부 건물은 없고 담장과 문만 남아 있다.

부부 합장묘를 보니 부부의 인연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한다. 화순옹주 홍문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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