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나면서 목적지를 향햐 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긋나면서 앞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의 걷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걸을 때 살펴보면 참 불합리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두 발 중에서 한 발로 지상에 서 있고 한 발은 허공 중에 떠 있다. 손은 더 이상하다. 걷는 다는 것은 손과 발의 어긋남의 연속이다. 오른손이 앞으로 나가면 왼손이 뒤로 간다. 오른손과 왼손이 어긋난다. 발로 마찬가지이다. 오른발이 앞으로 가면 왼발은 뒤에 남는다. 오른발과 왼발이 어긋나야 앞으로 갈 수 있다. 인생은 결국 어긋나면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아는 분 중에 황안나라는 분이 있다. 교사생활을 정년퇴직하고 친구들하고 등산을 하러 간다고 집을 나와서는 국토종주를 한 분이다. 인생 처음 도전한 것이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의 휴전선까지 종주였다.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그때 황안나 님의 나이 65세였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때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젊은 사람도 해 내기 어려운 일을 회갑을 넘긴 나이에 가족도 모르게 시작했다. 국토 종주를 하고 나서 출판사의 권유로 책까지 냈다. 책 제목이 재미있다. 『내 나이가 어때서?』다.

황안나 님은 다시 더 큰 도전을 했다. 우리나라 바닷가를 따라 걷는 해안 일주를 약 4개월 동안 했고, 스페인의 산티에고 순례길을 걸었다. 얼마 전 만난 자리에서 황안나 님이 한 이야기가 생생하다.

황안나 님의 어머니가 계셨다. 혼자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정엄마가 안타까워 딸들이 의견을 모아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자 친정엄마는 반대했다. 내가 70세만 되었어도 받아들이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라고 하셨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위해 같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말씀드렸을 때도 반대하셨다. 몇 번의 다른 권유를 할 때마다 친정엄마는 70세 정도라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은 너무 늙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친정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젊은 나이가 70이라고 했다.

한데 얼마 전 다시 만났다. 황안나 님 자신의 나이가 지금 70세라면서 이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친정엄마가 그토록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로 잡았던 젊은 나이가 70세라면서 70세도 안 된 나이로 늙었다는 이야기는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자신이 늙었다고 하는 순간 늙은 것이다. 젊음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순간까지는 청춘이다. 마음이 늙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

황안나 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강원도 울진을 지나고 있어요.”

반가운 목소리였다. 아직도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울진은 웬일이세요?”

“다시 우리나라 해안 일주를 시작했어요.”

나이 67세에 우리나라 해안도로 일주를 완주하신 분이었다. 다시 길을 나선 것이었다.

“두 번째시네요.”

“원래 삼세번이라고 하는데 걱정이에요. 한 번 더 갈지도 모르니.”

“신발은 괜찮으세요?”

지난 번 해안도로 일주를 할 때 신이 닳아 세 번이나 갈아 신어야 했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등산화가 다 떨어져 세 번이나 새 것으로 갈아 신어야 할 만큼 힘든 길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나 싶기도 하다.

“요즘 신은 좋아져서 괜찮다 싶었는데 벌써 시원찮아 보이네요.”

황안나 님의 말씀은 늘 경쾌하다. 밝고 생기가 있다. 황안나 님은 내게 보낸 메일에 이렇게 적었다.“해안 일주를 시작했습니다. 일흔셋에도 가능한지 궁금해서요. 게다가 떠남증이 재발한 이유도 있구요. 그저께는 파도가 길길이 날뛰는데 눈길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다시 시작한 것이다. 73세에 우리나라 해안도로 일주를 시작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열정이 있는 한 청춘임을 확인한다.

해안일주를 시작한 지 한참 만에 다시 문자가 왔다. 4월 1일 시작한 후 한 달이 훨씬 지난 5월 25일이었다. 일주일 여행에도 지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혼자서 걷다보면 생각의 흐름도 쓸쓸함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외로울 때 날씨가 너무 쾌청하면 더 외롭듯 무한한 자유는 사람을 지치게 할 때가 있다. 세상과 내가 아무런 관계없이 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유가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황안나 님도 그랬나보다.

 

저는 왜 낯선 바닷가에서 혼자서 막막한 외로움에 울먹이고 있을까요! 떠나고 싶어 여기 왔건만 지금은 또 늙은 남편이 기다리는 집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바다에는 섬이 산처럼 떠 있고 모래사장과 바다가 펼쳐진 풍경과 함께 보내왔다.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을 더 외롭게 하곤 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듯 아름다운 풍경도 사람을 그립게 한다. 그리고는 지친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길을 떠나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 있다는 건 가장 잘 살았다는 증거겠지요.

 

나는 안다.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벅찬 것이라는 것을. 젊은 날에 정말 많이 걸었다. 이유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인생이 답답해서 걸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막막해지곤 한다. 이름 없는 산에는 사람도 없다. 집을 나가 버스를 타고 가다 아무 곳이나 내려 산으로 들어 해가 중천을 지나 기울어질 때까지 걷는다. 그 즈음에서 아무 곳이고 주저앉아 잠을 자곤 했다. 혼곤한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 다시 걷는다. 사람이라곤 구경할 수 없는 깊은 산속에서 혼자서 자다 깨어나면 이번에는 다시 왔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왔다. 돈이 없어 굶은 적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날을 그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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