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은 버리는 것의 연속이다

걷는 것은 버리는 것의 연속이다

오늘처럼 신비로운 날도 없다. 인생 내내 매일 만나 사소함으로 만나고 헤어지지만 인생은 결국 오늘의 퇴적물이다. 인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고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변화의 중심에 선 날이다. 인생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날은 ‘오늘’이다. 오늘에는 인생을 자라게 하는 생장점이 들어있다. 생장점은 살아있는 시간의 꼭짓점에 있다. 오늘은 여리면서도 아릿하지만 진보의 칼을 틀어쥐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영원한 숙제이며 성장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걷는 동물이다. 동물이란 단어에는 살아있다는 신화 같은 신비가 들어있다. 신비를 실현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은 걷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버리고 살라는 교훈을 보여준다. 발자국을 버려야 계속 발자국을 만들 수 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만큼 버려야 새로운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 발자국을 보면 서산대사의 시가 생각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서산대사의 이 시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인용해 더 유명해졌다. 서산대사는 조선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승병장이었다. 서산대사는 나이를 잊고 산 청년이었다.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선조의 명을 받고 1500명의 승병을 이끌며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마음이 청년이면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삶을 산 분이었다. 서산대사는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 그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고 가부좌한 채로 세상과 이별했다. 사람은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경구에 젖어본다. 진정으로 죽어 본 자만이 삶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장한 모습으로 죽는 것보다 장하게 사는 것이 진정 어렵다. 죽음을 이해해야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관 안에 들어가 죽었다고 가장하고 들어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경험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생각과 행동이 바른 삶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에 대하여 물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의 전환이다. 아름답게 죽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살아야 가능하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삶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죽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죽음은 지금 바로 선택할 수 있지만 삶의 선택은 길고 어려운 길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도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정 죽음이 두렵기보다 삶이 두렵다. 잘 사는 것만이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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