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는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을 것이다. 승선의 계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신라에서는 연속해서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을 찾아 당과 일본으로 건너간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일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후일 정년이 당에서의 생활이 참혹하게 되었음에도 돌아갈 곳이 없음을 한탄하는 기록을 보아도 정년과 장보고는 그리 여유 있는 집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견당사가 타고 오가던 견당선의 선원이나 수행무관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후일 무역을 하게 되는 것으로 봐 상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가 고위직이거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당에 입국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넘어지는 것은 세상의 원리고, 일어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실패는 자연원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시도하면 된다.

<번천문집>을 쓴 두목은 당나라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두보와 비교될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기록에 장보고가 기록되어있음은 특별한 사건이다. 더구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은 그의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번천문집>에서는 서주의 군중소장, <신당서>에서는 무령군소장, 신라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신당서>와 마찬가지로 무령군소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소장이란 말은 중국통사 제 2장 6절 「당조와 사방제국四方諸國의 각종관계」 중에 나나난다.

 

당태종은 매일 12위소장과 사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현덕진 앞에서 활쏘기를 연습했다.

 

12위 소장과 사병은 바로 천자의 금군을 말하며 이는 남북위병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소장과 장보고의 직책으로서의 소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인다. 무녕군소속이었던 장보고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중국의 양주대학교 강소성 문물 전문연구원인 주강이란 학자는 논문에서 소장은 자장子將을 말한다고 했다. 대당욱전에 상서병부에 의하면,

 

모든 군진에는 군사가 5천명 명이면 총관 1명을 두고, 군사 1천이면 자장 1인을 두고 과의로 하여금 임무를 맡기고, 군사 5백이면 압관 1인을 두고, 매 1천명마다 자총관 1인을 두고, 매 5천명마다 총관 1인을 두었다. 총관은 정충에게 임무를 맡겼고, 자장은 과의에게 임무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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