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는 싸움을 잘 했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당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장보고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인 <번천문집>의 내용이다. 장보고는 여러 가지로 눈이 띄는 사람이었고, 그에 걸맞은 공도 세웠을 것이다. 당나라와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서주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외국인을 정통역사서에 기록할 만큼 돋보이는 존재인 장보고였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이 같이 뛰어난 장보고를 같은 부대에서 모를 리가 없다. 왕지흥이 무령군의 실권을 잡기 전부터 같은 부대에서 활동을 한 장보고를 몰랐다면 도리어 무능한 군장이다. 이처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임에도 장보고의 직위는 군중소장에 머물러있었다. 장보고를 승진시키지 않은 점은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다. 왕지흥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822년에 왕지흥은 정병 3천명을 데리고 자기편이 아닌 사람 10여 명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자 조정에서는 할 수없이 무령군 절도사로 임명하였다고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장보고가 무령군 소속 군중소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떻게든 장보고와 왕지흥은 관련이 되었을 것이다. 장보고가 왕지흥의 입장에서 일을 도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반대파였거나 방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지흥으로부터 배척되어 진급도 되지 않았고, 신라로 돌아갈 생각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지흥의 성격을 위정가혹爲政苛酷이라고 하여, 다스릴 때 가혹하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장보고는 왕지흥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지는 않은 듯하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변화할 때 기회는 찾아온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앞서갈 수 없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하여 장보고는 많은 준비를 했다. 30대의 장보고는 혈기왕성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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