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라는 이름은 장보고가 신라의 왕을 만나기 이전에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와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장보고는 신라의 왕에게 웅대하고 야망에 찬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의 협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무령군의 정권을 쥔 절도사와는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설령 장보고가 왕지흥과의 관계 악화로 군중소장직을 그만두었다고 해도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관계 개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정치의 역학관계에서 흔한 일이기도 하다. 무령군 절도사는 재정적인 수입원이었던 상업적 거래와 상선을 이용한 활동을 지원 했을 것이고 그로인한 수입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상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보고는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모든 관계의 출발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출발한다.

장보고는 살길이 어려워 택한 타국에서 성공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고, 이국땅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자성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고, 자신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그러나 힘이 없어 떠나야했던 조국. 그 조국의 왕, 하늘과 같은 존재인 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장보고에게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왕과 만나는 날,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드디어 장보고는 여건이 무르익자 신라의 왕, 흥덕왕을 만난다. 당과 신라가 같이 살고, 신라의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획을 설명했을 것이다. 왕도 자신의 백성이 당나라로 건너가 성공한 장보고를 반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구할 만한 역량과 능력을 확인하고는 기뻐했을 것이다. 이 역사적인 날에 역사의 기록은 차갑다. 어디에도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사실만을 간략하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흥덕왕 3년 (828년) 4월에 청해대사 궁복은 장씨인데 (일명 보고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에 되었다가 후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찾아뵙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를 지켰다. (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한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청해진을 설치하게 되는 이유가 적혀있다.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하여 왕을 만나 중국의 어디를 가나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원컨대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청해는 해로의 요지로 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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