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산속에 절이 있는데, 적산 법화원이다.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다. … 지금은 신라역어겸압아인 장영과 임대사, 그리고 왕훈이 이곳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다.

<839년 6월 7일>

 

듣건대 장대사의 교관선 두 척이 단산포에 도착했다.

<839년 6월 27일>

 

당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한 왕을 위문하기 위하여 신라에 사신으로 보냈던 청주병마사 오자진과 최부사, 그리고 왕판관 등 30여 명이 절로 올라와 함께 만나 보았다. 밤이 되어 장보고가 파견한 대당 매물사인인 최병마사가 절로 찾아와 위문하였다.

<839년 6월 28일>

 

법화원이 있는 곳은 장보고가 대당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리였다. 법화원이 건립된 장소에는 이미 신라인들이 상당한 규모의 공동거주지역을 마련해 놓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불교사원을 졌을 것이다. 또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법화원은 필요했을 것이다.

중요한 점 중에 또 하나는 교관선이나 대당매물사란 용어의 등장이다. 교관선이나 대당매물사란 이곳에 장보고의 배가 정박하고 그를 관리하는 관리기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와 당나라간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보고가 대사란 직함을 가진 것을 여기에서 다시 그의 역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신라와 당 사이에 발해를 견제하기 위한 직함일 수 있다는 것과 해적의 소탕이라는 이중의 역할 수행을 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겉으로는 해적의 소탕이었지만, 더 깊은 내막 안에는 막 커가고 있는 발해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장보고의 원대한 꿈을 담은 제안이 신라와 당의 조정에서 논의 되었고, 이를 받아준 것은 장보고의 놀라운 통찰력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의 결과였다. 신라와 당은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는 큰 효과를 가졌고, 장보고는 개인의 영광과 상거래를 묵인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당은 당나라에서 활동을 하였고, 신라의 관리가 아닌 장보고가 적격자였을 것이다. 신라는 신라대로 안보적인 측면과 해적을 소탕하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장보고는 당과 신라로부터 모두 인정받아 활동의 근거를 마련했다. 양국간의 지원도 받았을 것이다. 신라에서는 군사 1만 명과 완도라는 지역의 이용권을, 당으로부터는 법화원을 세운 등주의 항구를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당나라 안을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을 것이다. 교간선이나 대당매물사란 용어가 이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탄생은 신라와 당 사이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읽어내어 자신의 입지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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