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진하고 실어 나른 것 중에서 주류 상품은 도자기였다. 도자기는 당대의 최고상품이었다. 지금의 반도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첨단물품이었다. 당시에 중국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도자기를 생산하려면 불의 온도를 1350℃로 만들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 도자기가 한국도자기의 자랑인 고려도자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자기 기술이 한반도에도 전해져 고려시대에는 도자기 중흥시대가 열리게 된다.

유럽과 중동에서도 도자기 기술이 발달했지만 중국과 한국도자기 기술에는 미치지 못해 중국과 한국 도자기를 최고의 상품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의 도자기는 낮은 온도에서 구운 토기형태로 되어 물을 담으면 힘이 없이 부서지는 약점과 유약으로 납성분을 써서 음식물을 담을 수가 없었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강도가 약하고 독성분이 남아있어 생활도자기로 쓰지 못했다.

장보고가 도자기를 주 상품으로 했다는 것은 중국의 정동과 한국의 완도 두 곳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당시의 도자기는 중국 절강성 지역에서 생산된 월요로 청자기가 주였다.

장보고 선단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는 것은 일본에서 당나라로 수도를 하러 갔던 엔닌의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당구법 순례행기에 “화상께서 구법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 반드시 이 편지를 가지고 연수에 도착하시면 제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일본으로 같이 가돌고 하겠습니다.” 최훈은 장보고의 부하였다.

장보고는 활달하게 활동했다.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고, 직접 현장을 시찰하거나 확인했다. 중국과 일본을 직접오가며 진두지휘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의 환속승 이신혜의 말에 “장대사는 천장 원년(824년)에 일본으로 왔었는데 돌아갈 때 그 배를 탔다가 당으로 와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그 배란 장보고의 배를 말한다. 장보고는 현장을 직접 오가는 활달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와 일본을 직접 오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했을 때가 828년이었다. 기록에 의한 내용으로 보면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왕을 만나기 전에 이미 당과 일본에 무역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오기 전에 사전포석을 깔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저작권자 © HKBC환경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