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7. 청해진의 출항

-살아있음은 축제다. 그 축제에 참가한 이상 생을 즐겨라.

청해진은 오지에 마련한 해로의 중심지였다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의 청해진에서 시작된 역사는 급물살을 타며 전진하고 있었다. 청해진의 출항은 동북아시아를 새로이 열어가는 활로가 되기 시작했다. 큰 꿈이 큰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중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선 장보고는 천해의 요새에 말뚝을 박았다. 보기에는 한반도의 남쪽에 진을 설치한 것이지만 그곳은 절묘한 곳이었다. 청해진을 배를 타고 찾으려면 리아스식 해안이 주는 해안의 들고남이 주는 변화무쌍한 곡예를 한 후에야 가능했다. 물 또한 들고남의 변화가 커서 물때를 잘 모르면 뻘에 갇히기 십상이었다. 청해진은 그곳의 특성과 지리를 모르면 찾아내기 힘든 곳이었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도와 주변 섬은, 섬 속에 또 다른 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곳이 청해였다. 지금의 완도다. 장보고는 삼국을 통한 무역을 하면서 직접 항해를 하며 체험했다. 직접 일본을 오가고, 신라의 해역을 익히고, 당의 해로를 익혔다. 보고 익힌 것들을 종합해서 찾아낸 곳이 청해진을 설진한 완도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구상해 왔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청해진이 동북아에 불던 바람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원동력의 중심지가 청해진이었다. 동북아라는 신라, 당나라, 일본이로 이루어진 삼국의 바다인 황해가 청해진에 의해 꿈을 꾸고 현실이 되기 시작한 그 발원지가 완도였다.

완도는 장보고가 태어난 곳이라 그곳에 설진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청해진은 발해의 위협을 방어하기위한 신라와 당나라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염두에 둔 장소였다. 국방과 안보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무역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안정적인 해로를 고려했다. 당시의 배는 돛배였다. 크기도 작았다. 거칠고 험한 큰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안전한 해로를 찾아야했다. 섬을 기거나 내륙을 기고 항해를 하면 위한 상황이 왔을 때 착륙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청해진이 설진되었던 완도는 섬과 섬 사이에 있다. 어찌 보면 호수 같은 느낌을 준다.

셋째는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대처하기도 좋다. 굳이 다도해로 이루어져 복잡한 해안선과 미로와 같은 해로를 해야 함에도 이곳을 택한 이유는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였다. 항해하는 사람으로서는 찾아내기 힘든 해로와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물이 들고 나 물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고, 뻘에 갇혀 꼼짝도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내륙에 접한 곳에 청해진을 설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곳에 장소를 마련했을까. 우선은 방어적인 측면을 적극 고려했으리라 보인다. 당에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했던 장보고에게 신라조정은 어쩌면 낯 설은 곳이었다. 신라의 누구에게도 위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보다 독립적인 장소를 고려했으리라 보인다.

넷째 무엇보다 청해진을 설진한 완도를 말할 때 지정학적인 고려를 하는 것이 맞다. 당시 신라의 교역품을 운송하기에 육로보다는 해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했다. 서해안에 위치한 한강하구나 남양만의 당은포는 육로를 이용해야 했다. 당시의 도로 사정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보다는 해로를 통해 경주까지 가는 것이 편리했다. 육로를 이동할 수 있는 양보다 선적량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배가 많은 양을 적재할 수 있었다.

다각적인 검토 끝에 청해진은 구축되었다. 큰 틀에서 발해를 염두에 두고 신라와 당의 연합적인 해상권 확보였지만 부분적인 것들도 적극 고려되었다. 상품을 교역하는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마련되었다. 일본의 견당사를 이동시켜주는 역할과 일본으로 가는 상품을 실어 나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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