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9. 청해진의 정치 경제적 관계와 지정학적 위치

-장애물 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으라고 있다.

청해진은 왜 섬에 설진했을까

과연 장보고란 존재는 누구인가. 그가 한 역할을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사무역이 가능했을까. 대사라는 직함에서 신라조정이나 당으로부터 특별한 존재였음을 이야기 했지만 그가 진정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 나당 간에 합의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진하게 되었는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한 나당연합 성격의 청해진 설치라면 왜 신라인인 장보고에게 그 이무를 맡겼을까. 당시의 세력분포로 볼 때 당의 기득권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고, 당은 조공을 받는 나라였다. 그만큼의 위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가 우선이었다면 분명 당의 조정에서는 자신의 나라 사람을 책임자로 앉혔을 것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진하게 된 이유에는 아마 남하 시에 방어 전략의 하나인 해상권장악과 맞물려, 신라에서 강제로 사람을 끌어다 당에 파는 해적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국인 신라에서 설진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라와 당 모두 필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장소가 신라의 남쪽 섬, 완도인 것도 이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1만이라는 대군을 거느린 청해진을 신라의 수도가 위치한 동해의 어느 곳이나, 내륙의 어느 지점을 선뜻 내어주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고,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만 명의 군사 지휘권을 주고, 그들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될 인물을 선정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러한 땅을 제공해주는 일도 어려웠다. 신라로서는 큰 모험이었다. 필요는 하데,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오지인 신라의 가장 남쪽인 섬이 주어졌으리라 싶다. 당시의 진은 내륙에 근거를 두고, 바다로 나아가는 형태였다. 배를 만들고, 정박시키고, 수리하는 곳은 내륙의 포구에 설치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다. 운송이나 인원의 왕래뿐만 아니라 짐의 선적과 하역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당시나 지금 모두 포구의 중심은 내륙에 연한 내륙에 본진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리운영상 이로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청해진은 달랐다. 섬에 근거지를 두었다. 서해에도 섬은 많았고 그 당시까지는 남해안에 근거지를 둔 포구로 신라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황해는 중심역할을 했다. 완도는 신라에서도 남쪽 변방인데다 다도해로 언뜻 그곳이 포구로써의 역할을 멋지게 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보고 자신이 배로 당과 일본을 오가면서 완도가 무난한 것을 알았겠지만 앞서 말한 발해의 견제와 해적의 제거라는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발해의 남하와 해적의 소탕을 위하여 진을 설치한다면 서해안이 보다 적격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남하를 방어하기에는 아직도 돛을 이용한 항해를 하던 시기라 서해와 남해의 거리 차이는 컸다. 서해안의 한 곳에 수군을 배치시켜 공격에 대비하는 편이 남해에서부터 올라오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해적이 소탕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도 궁색하다. 당의 기록과 신라의 기록에서 모두 서해안에서 해적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굳이 남해에 설진할 이유가 없다.

장보고를 견제하기 위해서와 일본을 염두에 둔 설진이라면 완도가 좋은 곳일 수도 있다. 그보다는 여러 가지 정황상 신라조정의 견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1만이라는 군사집단은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이었다. 그러한 강력한 군사집단을 서해안 어딘가 설진한다면 두려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장보고는 신라의 체제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라에서 장보고가 필요했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신라 조정은 반란으로부터 어느 정도 견제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도 어쩌면 보다 독립적으로 운영하는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승낙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겨냥해 무역을 했을 때 완도는 적정한 위치일 수 있었다. 장보고로서는 섬이라는 불리한 곳에 설진하는 것이 운영상 불편하지만 간섭이 배제되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도 했다.

이러한 근거에는 청해진의 설진을 허가한 흥덕왕이 서해안에 신라관제의 체제 안에 들어있는 진을 별도로 서해에 포진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한강 하구 아래에 위치한 남양만에 당성진을 설치했다. 당성진은 신라의 관제와 병제에 의하여 설치된 진이었다. 당성진은 당으로 통하는 항로를 통제하고 대당외교에 보다 신속하고 이용하기엔 적당하고 가까운 곳이었다. 당성진은 이러한 목적 외에 남해의 청해진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청해진을 828년 설진허가를 내리고, 바로 당선진을 그 다음해인 829년에 설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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