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의 활동과 유적을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은 아주 초기 단계에 있다. 장도와 법화사지에 대한 발굴이 이제 겨우 이루어졌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주름무늬병은 청해진 시대의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는 장도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기형과 문양이 동일하다. 해무리굽 청자 역시 그러하다. 중국의 월주요에서 생산한 것으로 여기지는 해무리굽 청자는 중국에서 7세기경부터 시작하여 9세기 전반기까지 생산했다. 법화사지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청해진 운용시기와 일치한다.

장도에서 출토된 것과 역사기록에서도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도에서 출토된 철제와 청동제의 제사용기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삼국사기》 <잡지> 제1 제사조의 내용이 이런 내용이 있다.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에서 중사中祀를 지냈다.

조음도가 지금의 장도였음을 말해준다.

장도는 본진이 있었지만 1만 명이라는 군사와 배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작은 섬이다. 장보고가 머문 본진이 있었던 섬이라고 보면 된다. 많아야 몇 백 명이 주둔할 정도의 섬이다. 장보고가 머문 청해진의 중심이었지만 행정적인 업무와 지휘를 위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도의 크기로 보아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이 들어서기에는 작다. 실용적인 운영을 위한 건축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장보고는 삼국을 관장하는 원대한 꿈이 무르익는 전진기지였지만 그 중심지 장도는 작았다. 장보고는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청해진을 분산시켜 관리했다.

청해진은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 그리고 주변 섬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지였다. 내륙의 일부도 장도와 긴밀하게 연결된 기지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도를 축으로 해서 주변 섬과 내륙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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