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무역의 활로를 열기위해 직접 뛰었다.

장보고는 완도를 축으로 해서 주변 육지의 일부뿐만이 아니라 흑산도와 제주도에까지 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는 장보고 당시 신라땅이 아니었다. 신라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독립국이었다. 장보고는 실제로는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과 탐라국을 자신의 나라처럼 드나들며 무역을 했다. 이들 국가들이 거부반응을 별달리 보이지 않고 장보고를 받아들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황해를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서로 침공하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이들 나라를 드나들며 무역을 했다. 자국의 배가 아니면 연안에 상륙할 수 없는 것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허락 없이 자국의 연안으로 들어오거나 내륙으로 들어올 경우에는 염탐을 위한 침입자로 처벌받았다. 장보고는 어떤 경로로 이들 나라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을까.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다. 무역이 일반화한 지금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장보고는 그만큼 용의주도하게 많은 삶들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속일본후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장보고가 얼마나 무역을 열기위해 노력했는가를 볼 수 있다.

840년 12월, 신라의 신하인 장보고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841년 2월,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에 말안장 등을 바쳤는데, 장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하로 감히 공물을 바치니 옛 규범을 상고해 보면 정당한 물건이 아니다.

문은 두드려야 열린다. 하루아침에 저절로 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인맥을 만들었다. 닫혀있던 문을 열기 위해 장보고는 현장을 직접 지휘하고 토산물이나 말안장 같은 것들을 주면서 거래를 열고자 노력했다. 당나라에서 맨몸으로 일어나 무역에 손을 대면서 구축한 인맥이 있어 큰 상인으로 자라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본의 기록에 적혀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임에 틀림없다. 청해진을 설진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방분한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극적으로 판로를 개척했다. 토산물이나 말안장 등을 바쳤다는 것은 무역을 트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좋은 물건을 견본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장보고가 직접 이 정도로 뛰었다면 수하에 있던 사람들도 현장을 누비며 새로운 상품을 찾아내고 원하는 곳을 찾아가 팔았을 것이다. 물건이 모자라던 그 시대에도 장보고는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발하고 인맥을 구축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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