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배달학회 조직·전 재산 독립자금 지원

▲ 임시정부에서 총무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경남 하동 출신 황남(篁南) 문영빈선생 (사진=하동군)

문영빈(文永彬)은문영빈(文永彬·1891∼1961·북천면)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17세손으로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4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배달학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총무처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문영빈 선생을 임시정부수립 100년 만에 재조명하고 서훈을 추진한다.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당시 언론보도와 선생의 손자 문여황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가 제공한 자료 등에서 선생의 활약상과 백산무역(주)을 통한 독립자금 지원, 한용운 선생이 결성한 만당(卍黨)에서 항일운동 등을 확인했다.

자료조사에 따르면 문영빈 선생은 1914년 24세에 하동에서 김홍권(양보면·건국훈장), 강한조 선생과 함께 처자를 거느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고, 1915년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배달학회(상해 임시정부 전신)를 조직하고 총무부장직을 맡았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자금정조책(資金整調策)을 수립·계획하고 환국했다.

환국 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있던 전답 1000여 두락을 한성은행에 담보해 자금을 마련하고 안희제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을 설립,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로 참여하며 초대 상임 감사역을 맡아 독립운동에 힘썼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 조달 창구역할을 한 회사로, 투자자는 경주의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안희제(의령), 윤현태(양산), 문영빈, 정재완(하동) 등이었다.

선생은 안희제와 함께 지하공작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수색·감금 등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그런 후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백산상회는 1927년 문을 닫았다.

백산상회가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다는 증언은 백범 김구 선생의 입에서 나왔다. 광복 후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언급해 문영빈 선생이 함께했던 백산상회의 독립운동 지원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1929년 불교계 항일 지도자 한용운이 결성한 만당(卍黨)의 비밀결사에 참여해 김범부, 이기주, 김법린, 최범술과 함께 경남 사천시 곤명면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에 재정 지원을 전폭적으로 했다.

자료를 제공한 문여황 교수는 “조부께서는 업적에 있어 드러내기를 꺼려하셨다”며 “공을 멀리한 삶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조부가 타계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독립운동 재조명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문영빈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이제야 찾고, 관심을 갖게 돼 죄송스럽다”며 “행정에서 선생의 숭고한 뜻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경남독립운동연구소와 정부서훈을 시급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재상 소장은 “일제의 억압이 서슬 퍼렇던 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목숨은 물론 가문 전체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며 “선생의 위국헌신이 정부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임시정부에서 총무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경남 하동 출신 황남(篁南) 문영빈선생 묘소(사진=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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