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문화로 이미지를 창조

장보고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멸시를 당할 소지가 있는 신라의 섬 출신이라는 것이나 군중소장은 무역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청해진을 설진하기 전 이미 당나라 등주에 지은 법화원이 장보고의 이미지 개선과 개인적인 성공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보고는 계속 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다. 무관이라는 신분은 국제무역에 있어서 저항을 받을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장보고가 국제무역을 하면서 당나라와 일본에 입국을 하게 될 때에 불리한 신분이었다.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전체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했다. 포용과 안정을 주기에는 종교적인 이미지가 적당했다. 삼국 모두 불교가 전파되어 이미 왕으로부터 하층민에게까지 파급되어 있었다. 불교는 정신적으로 위안과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문화의 파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장보고는 자신의 선박이 들어가는 곳에 절을 세웠다. 절은 장보고를 인식하는 상징물이었다. 장보고라는 한 인간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역할을 충분하게 해주었다. 문화와 복지역할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장사꾼의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떠올릴 수 있는 대표성을 가질 수 있었다. 장보고하면 신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오르도록 했다.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에서 장보고는 필요한 존재로 부각되어갔다. 무역 그 자체가 주는 힘도 컸지만 장보고라는 인물이 삼국에서 자연스럽게 인식되어가는 단초역할을 한 것이 장보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찰의 건립이었다. 문화사업을 무역에 도입한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

장보고는 세상을 큰 틀에서 보았다. 장사를 내서 이익을 내기 위한 좁은 시야보다는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기틀로 무역을 선택했다. 단기적인 이익만을 생각했다면 위험이 따르는 해적 소탕을 우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찰을 여러 곳에 건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보고는 그의 힘이 미치는 곳에 사찰을 자신의 힘으로 건립했다. 한중일 현지답사 연구 결과와 문화재 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그리고 제 1회 국제 심포지엄 발표내용을 종합하여 발표한 내용을 소개한다.

완도 상황봉 법화사, 제주도 하원동의 법화사, 중국 산동반도의 법화원, 절강성 천태산의 국청사 ․ 신라원 그리고 일본 교토의 적산서원 등은 종교적으로 정신문화사적으로 모두 직간접으로 장보고 대사의 활동과 관련이 크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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