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기호철, 김재홍, 심준용, 동행기자 정영자, 차문성
<HKBC환경방송=장영자 기자>숙빈 최씨가 숙종 44년(1718) 49세로 졸했을 때는 원호(園號)조차 받지 못한 그냥 숙빈묘라 이름 하였다. 영조 20년(1744)에 이르러 묘호(廟號)를 육상이라 하고 무덤의 명칭(墓號)은 소령묘라 부르게 되었다. 자식이 왕이라도 함부로 권도를 행해 대폭적인 격상을 할 수는 없었다.

영조29 (1753)년에 이르러 최숙원 봉작 60주년을 기념해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높여 존호를 부르고, 소령묘 역시 소령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공개 원이라고는 하지만 무덤의 주인공은 세간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한 때 국민드라마로 불린 ‘동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장희빈의 거센 세도에도 약자인 인현왕후를 도와 정의의 편에 선 인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출신이 무수리로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낮은 신분이었기에 그의 무덤에 대한 기자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조선왕릉과 세자, 세자빈의 무덤을 일컫는 원과 왕자묘 120기 중 현재 부분 비공개를 제외하고 완전 비공개로 되어 있는 것은 12기에 달한다. 능으로는 파주의 장릉과 남양주의 사릉, 양주 온릉이 있고, 원으로는 양주의 순강원, 파주의 소령원과 수길원이 해당된다.

대부분 외딴 곳에 떨어져 있어 관리의 어려움과 주차시설의 확보가 어려워 비공개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헌과 문물’ 학술회원(이하 문문)들이 비공개 능원의 현황과 학술 자료조사를 위해 파주의 소령원과 수길원을 방문한다기에 환경방송에서 동행취재를 했다.

문문이란 학술단체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학술자료와 현장답사를 통해 고증하고 조사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이 날 조사는 차문성, 기호철, 심준용, 김재홍 위원이 모여 건축과 공예, 조각, 서지학적인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영조는 숙빈에게 “화경”이란 시호를 내리고 소령원으로 봉원(封圓)한 후, 석 달 뒤 친행을 시작한다.

무려 그의 재위 기간 52년 동안 육상궁은 총 232회, 소령원은 총 17회를 친행하여 영조의 숙빈 최씨에 대한 애정은 절대적이었다. 소령원을 친행할 때는 서대문을 나와 지금의 구파발인 검암원을 지난다.

지금의 삼송신도시가 있는 신원(고양 덕양교 비석 인근)에서 유숙하고, 혜음령과 미륵재를 지나 주정소인 분수원에서 잠시 머무른다. 여기서 광탄으로 곧장 가서 “소령원”과 “수길원”(원래 “유길원”이었으나 문화재청에 명칭 변경을 요청해 2003년에 변경 고지됨)에 이른다.

같은 차로 이동하면서 고양과 파주의 옛길인 혜음령을 넘어 곧장 소령원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잠시 방향을 틀어 윤관묘를 들렀다. 차 위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근방이 영조임금이 어머니인 숙빈최씨 묘를 들리면서 잠시 쉬어가던 주정소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자료조사를 담당한 기위원은 영조가 생모인 숙빈의 묘소를 찾아가면서 분수원이 역원의 중간거리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분수원을 북쪽으로 10여리 옮겼기 때문이란다. 그렇더라도 당시의 초석의 일부는 남아 있어야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의 일부 돌은 영조 20년 소령이란 묘호(墓號)를 내리면서 일부 돌을 이전해 묘의 석물(중배설석)을 추가했다는 기록을 찾은 바 있다고 했다.

     좌우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무들은 소령원의 또 다른 미적 요소다.
소령원 길에는 예전보다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그래도 아직은 비공개 원이므로 다른 능원보다는 소음에 차단되어 있는 편이다. 산자의 집이 아니라 죽은 자의 집 능원 길은 제일 먼저 딱따구리가 반겨준다. 비가 약간씩 내리지만 이럴 때 사진은 최상이다.

낮게 깔린 안개와 정감 있는 정자각 그리고 하얀색의 석물은 능역에 만연한 초록색과는 확연한 대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금천교를 지나면 산자의 영역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역이 시작된다.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들이 눈에 많이 띄어 넌지시 물어봤더니 능원에는 송백(소나무와 잣나무)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아마 추위에 잘 견뎌 정절과 고결함의 상징이기도 하겠지만 붉게 휘어진 가지에서 마치 시립해 있는 신하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참나무와 상수리같은 다양한 수종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려 숲으로의 면모를 갖춰간다.

묘소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있는 나무들은 다른 어떤 능원에서도 볼 수 없는 좌우 균형감을 가지고 있어 언뜻 보기에도 천하명당의 요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풍수지리란 바람과 물과 땅의 지형과 지질을 가리키는 말로 하늘, 물, 땅의 기운이 음택에 미치는 영향이 후손의 길흉화복을 좌우한다는 일종의 믿음이다.

    영조 때의 원형을 간직한 정자각의 모습
먼저 신도와 어도가 박석으로 만들어진 참도를 지나 동쪽(우측)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망자가 올라가는 계단은 궁궐의 계단처럼 소맷돌에 태극이 새겨져 있었고, 임금이 이용하는 계단은 보통의 계단에 불과했다.이곳이 산자를 위한 곳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제향공간이라는 의미다.

반대편 서쪽의 계단은 신계는 없고 사람이 이용하는 계단 하나만 달랑 남아있다. 신은 정자각의 문을 통해 묘소로 올라가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자각을 올라갈 때는 동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른바 동입서출이다.

정자각의 기단은 기록처럼 삼단으로 장대석이 놓여 있지만 제일 하단은 흙에 많이 묻혀 있었다.

토사가 많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각은 ‘丁’ 자의 구조로 단출하지만 제향공간으로써의 최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뻗은 부분은 넓은 월대가 있고 비와 바람을 피해 행사를 준비하도록 풍판을 정면과 좌우에 설치해 두었다.

정자각은 원형의 건물로 익공이지만 천정은 행사를 위해 다른 곳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런 이유로 기둥에는 두 개의 나무를 이은 장부 맞춤이 보인다.

    위에서 바라 본 비각
정자각의 뒤편에는 특이하게도 두 개의 비각이 있다. 위의 비각은 숙빈묘에서 소령묘로 추승된 후 세워진 것이고, 아래의 것은 소령원으로 추숭된 후 세워진 것이다.

먼저 위에 있는 비석을 살펴보면 사각의 농대석과 그 위에 커다란 비신과 가첨석을 올린 “숙빈해주최씨소령묘”라 명문이 새겨져있다. 기단인 농대석의 전면에는 소령묘로 옮긴 것과 지석을 혼유석 아래와 삼계 아래에 묻어둔다는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비음기에는 영조의 어제가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아래 소령원으로 추숭한 후 영조 자신의 어필로 직접 쓴 해서체의 비석이 있다. 기 위원은 영조의 어필은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국 화경숙빈소령원(朝鮮國 和敬淑嬪昭寧園)”.

   소령묘 비문
    소령원 확장 후 영조가 쓴 비문

 

 

 

 

 

 

 

 

화경은 묘에서 원으로 격상된 후의 시호가 될 것이고, 직책은 숙빈, 원호는 소령원으로 이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비의 진면목은 전면이 아니라 비의 뒷면인 비음기에 나타나 있다.

“숭정기원후 126년 (1753년) 이 비를 세워 (중략) 사친(私親)이 봉작된 지 60년이 되자 비의 전 후면에 눈물을 삼키며 이 글을 적다.”란 말로 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왕후가 아닌 사친 즉 나의 어머니라 부르는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명목상 그의 어머니는 후궁이기 때문이다.

해주 최씨란 본관보다도 ‘수양(首陽)’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해주에 있는 수양산성에서 지명을 사용한 듯하지만, 내면에는 백의숙제의 고결함을 어머니에게 붙이려는 자식의 효심이 담겨있는 있다고 기 위원이 말한다.  영조는 나이 70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묘소를 직접 친행을 했다는 점에서 정조의 효심은 영조의 이런 원행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각의 가첨석과 비신은 260여년이 지난 후에도 마치 얼마 전 조성한 것처럼 깨끗하다. 무덤의 입지까지 몸소 살폈다는 그의 효심을 생각할 때 최고 재질의 빗돌을 고르지 않았을까. 아무튼 두 개의 비각의 위치로 인해 원역이 확장된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령원의 석물
굽이 휘어진 능역을 돌아서 올라가면 망주석이란 것이 있는 데 조선 초기에는 묘제를 지낼 때 차양을 달기 위해 구멍을 내어 줄을 넣고 차양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례의가 정착되어 세호의 구멍은 정자각의 활용으로 인해 점차 퇴화된다. 동쪽으로 한 마리가 올라가고 건너 편 망주석에는 내려오는 모양인데 익살맞기 그지없다.

석물배열도에는 묘표석, 혼유석, 상석, 장명등, 제주병석, 중배설석, 망주석과 문석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석물들은 없는데 현재는 석양과 석호가 능역에 한 쌍씩 배열되어 있고 문석인 아래에는 석마도 한 쌍이 배열된다. 이는 소령원으로 격상되자 정자각과 석물들이 추가로 들어 선 모양이다.

상석에는 향묘(向卯)라 되어 있어 묘의 방향이 동쪽으로 향하고 묘소가 서쪽으로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인석, 무인석이라 말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문석인, 무석인이라고 한다.

문인석이라 함은 망자의 묘역을 하나의 조경물로 보는 관점이고, 문석인이라고 하면 죽은 자의 세계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조사위원들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한다.

이곳 원역에는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의 좌측에 큰 건물지가 있는데 관리인에 문의해 보니 이를 아흔 아홉칸 집이라고 하며 한 때는 시묘막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내판에도 시묘막이라 적혀 있는데 조사위원들은 뱀과 날벌레들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숲길을 들어선다.

제청조사

     소령원 제청도
무수리인 어머니와 숙종을 아버지로 둔 영조의 고뇌는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재공의 글에서 알 수 있다.“선왕께서는 소령원의 장지를 구할 때 몸소 답사했읍니다.”라는 글에서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이 시묘막이란 단순한 구조물일지 궁금증을 더한다.

기 위원이 제공한 ‘제청도’를 살펴보니 36칸의 건물에 대문은 동쪽으로 향하고 우측의 계단을 지나 중문을 통과하면 제청으로 들어서는 형태의 건물이다. 제청에서 우측의 문을 두 개 통과하면 제청의 뒷면에는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화계가 존재한다.

“과연 화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차 위원의 말은 지금은 숲이 형성되어 아래의 주춧돌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 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비가 쏟아지면서 높이 솟은 풀들이 숨을 죽여 나지막해졌다.

숲을 헤쳐 들어가니 그야말로 주춧돌들이 사방에 나열되어 있었다. 약 30여 칸의 건물이 정확히 맞았다. 중문으로 연결된 계단지를 찾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동쪽 아래서 서쪽으로 연결된 커다란 건물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속설로 전해져 온 99칸 건물이라든지 시묘막이란 말은 ‘제청도’ 그림 한 장으로 사실 확인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화계는 어디에 있을까? 

 묘소의 방향과 같은 서쪽에 주변보다 약간 높은 축대가 있었다. 숲을 헤치자 기 위원이 소리쳤다.

    제청터에서 발견된 주춧돌인 신방석
“여기에 화계석이 남아 있습니다.” 상하 2단의 화계로 제청도의 그림과 일치했다.
영정조시대의 반차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약간 위에서 바라보면서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부감법의 형식은 왕실기록을 적은 등록의 그그림에서도 놓치지 않았다.

“제청급석물조성시등록”을 참고해 그대로 확인한 문문 조사위원들의 성과였다. 그렇다면 제청건물의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석담은 무엇일까?

    제청터에 남아있는 석담
심 위원은 조심스럽게 이 담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담으로 인해 주춧돌들이 교란을 일으킨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이유에서다.

시묘막은 원래 3년 상을 위한 것인데 이렇게 커다란 건물을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제청 뒤에서 발견된 화계
이에 대한 해답은 ‘묘산도’에 있었다. 원래의 시묘막은 두 칸 초옥으로 기임각 혹은 기념각이라 불렸는데 1753년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확장하면서 기념각 자리에는 홍살문을 세우고 기념각은 제청 안에 옮기도록 영조가 명한 것이다.

하나의 기록과 현장조차 헛되게 쓰지 않으려는 영조의 효심이 놀라울 정도다.

재위기간동안 무려 17회나 소령원을 찾아가면서 길을 넓히고 역원을 살피면서 민심을 살피던 영조의 효심은 다음 정조로 이어져 우리나라 최고의 수원화성과 현륭원(융릉)을 만들게 된다. 한 명은 아들을 잃고 다른 한 명은 아비를 잃은 공통된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 효심으로 승화된 때문일 것이다.

답사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추상적인 역사를 구체적이고 사실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인들과의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은 단순한 즐거움 이상이며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문문(문헌과 문물) 학술회원들은 앞으로 추가적으로 비공개 능원을 찾으면서 기록과 현장과의 차이점을 꾸준히 찾고 이의 결과물을 낼 것이라 귀띔하고 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고개를 돌려 숙빈최씨의 아들을 향한 애정과 영조의 효심이 담긴 소령원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의 말처럼 이곳은 단순한 능원이 아닌 영조의 효심이란 다빈치코드가 담긴 곳임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HKBC환경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