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롬비아 참전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란에 휩싸인 대한민국을 구하고자 UN은 즉시 파병을 결정한다. 6.25 전쟁에 참전한 UN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 미국만이 아니다. 저 멀리 남미에서 온 콜롬비아 군인들도 있었다.

콜롬비아는 남미국가 중 유일하게 6.25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했다. 우리나라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머나먼 곳에 있는 나라다. 이 나라는 참전을 결정하자마자 미국식 장비로 재무장한 후 미 교관단으로부터 12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또한, 189명이 탑승한 해군 프리깃함도 한국 해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기 위해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에 나섰다.

1951년 4월 프리깃함 파딜라호가 한국을 향해 출항한 데 이어 1천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1보병 대대도 5월 21일 미국 수송선을 타고 콜롬비아를 떠났다. 이들은 1951년 6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한미 고위 장성 그리고 한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에 입항했다. 육군으로는 UN군 중 마지막으로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콜롬비아는 총 4회에 걸쳐 교대 병력을 합쳐 연인원 5천100여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들은 6.25 전쟁 중 김화 400고지 전투, 연천 180고지 전투, 골모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모토를 지켜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전 기간 중 전사 143명, 실종 69명, 포로 30명과 부상자 등의 고귀한 희생이 뒤따랐다. 휴전이 된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유엔군 방어작전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 콜롬비아 참전비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전국에 6.25 참전국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이 진행됐다. 인천에는 콜롬비아군 참전비 건립이 결정됐으며 그해 9월 24일 서구 가정동에 비(碑) 높이 10m, 기단 높이 2m의 콜럼비아군 참전비가 세워졌다.

매년 콜롬비아 독립기념일에 주한 콜롬비아 대사와 6.25참전유공자회 서구지회 회원들이 참석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우리의 무심 속에 멀리서 불어온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동상의 군인들은 인천을 굽어보고 있다. 낯선 땅에서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생명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뜻이 비문에 몇 자 적혀 있다.

‘카리브해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611명의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

6.25 전쟁에 UN은 16개국의 전투부대를 파견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을 했다. 모두 6대륙 21개국에서 전투부대 연인원 193만8천330명이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들의 희생은 컸다. 전사·실종은 4만4천786명, 부상은 10만4천28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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