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 해역에서 세계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 연출됐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만나 냉전체제를 종식하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몰타 선언’이다. 미·소 정상은 동유럽의 체제전환, 군비축소, 경제협력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담을 계기로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냉전 질서가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대결은 협력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탈냉전의 세계적 기류 속에서도 한반도의 냉전은 진행형이었다. 남북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대결과 갈등을 반복하며 수십 년간 각축을 벌여왔다.

2018년 4월 27일 반전의 드라마가 한반도에도 펼쳐졌다.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을 천명했고 남북 정상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합의했다. 남북관계 발전, 군사적 긴장완화, 평화체제 구축 등이 골자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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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판문점 선언’을 ‘몰타 선언’에 버금가는 선언으로 평가했다. 두 정상이 한반도에서 냉전체제의 해체를 위해 첫발을 내디뎠을 뿐 아니라 모든 대결과 갈등이 평화를 향한 여정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김 교수는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북, 북미의 신뢰가 전무한 상황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국면이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되는 점도 주목했다. 최고지도자들이 결단을 내리고 큰 틀에서 일괄 타결하면 당면한 문제들을 단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첫 여정을 시작했을 뿐이라는 것. 김 교수가 생각하는 판문점 선언의 의의와 한반도 정세 진단을 들어보자.

남북정상회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2018 남북정상회담’은 ‘토론 중심 대화 집중’ 여덟 자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중심에 도보다리 회담이 있다. 남북 정상이 40분간 허심탄회한 대화를 한 점이 핵심이다. 100분간 진행된 오전 회의에서 상당 시간 판문점 선언의 문구를 가다듬었을 거다. 비핵화 문제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 대화는 도보다리 위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도보다리에서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며 문 대통령은 자신의 입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까지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도 문 대통령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을 것이다. 또 두 정상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나누지 않았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또는 그 이전부터 평화체제 구상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은 평화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출생부터 실향민의 아들로 분단의 아픔을 느끼며 성장해왔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문 대통령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정상회담 전반에서 배려도 돋보였다.

남북 정상이 서로를 배려한 것 같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통령 호칭에 계속 ‘님’을 붙였다. 리설주 여사도 마찬가지다. 판문점 선언을 하기 전 기자들 앞에서 ‘대통령께서’라고 한 것 외에는 모두 ‘님’을 붙이며 존중을 표했다. 회담에 참석한 수행원들은 김 위원장이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현장에서 본 김 위원장은 통 크고 자신감 있으면서도 예의가 바른 것 같다. 

판문점 선언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남북관계 발전’에서 주목한 부분은 무엇인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 지역에 설치하기로 한 점이다. 공동연락사무소는 판문점 선언 실천과 관련해 실무 기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남북 사업을 함께 하고 비핵화 평화체제 논의의 틀을 발전시키는 거다. 일종의 실핏줄과 같다. 이 부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북과 남·북·미가 신뢰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돌파해나가는 게 아니라 상황을 돌파하면서 신뢰를 쌓고 있는 과정이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신뢰를 쌓아가는 데 공간적 역할을 잘할 것이다. 개성이라는 지역도 잘 잡은 것 같다.

연락사무소를 서울과 평양에 동시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건 나중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신뢰가 없는데 만들어놓기만 하면 뭐하나. 공동연락사무소가 발전하면 서울과 평양에 상호대표부를 설치할 수 있다. 개성은 그걸 지향하는 출발점이다.

판문점 선언 ‘군사적 긴장완화’ 측면에서 어떤 점을 주목했나?
핵심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다.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는 원상복구 개념이다. 원래 비무장지대는 무장 병력이 들어갈 수 없다. 그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만 통제하도록 민정경찰만 일정 수 들어가게 돼 있다. JSA도 마찬가지다. 1976년까지는 JSA 내에서 총도 안 갖고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1976년 사건(일명 도끼만행사건) 이후 지금의 상황이 됐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발적·돌발적 충돌사태를 원천적으로 막는 일이다. 큰 줄기를 잡았는데 작은 부분에서 충돌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진다. 중요한 건 원래대로의 정상화다. 그다음 종전선언이 나오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비무장지대가 또 다른 차원으로 바뀌어야 한다.

5월 1일 대북방송 확성기가 철거됐다.
그게 출발이다. 대북방송 확성기는 1963년 5월 1일 설치됐다. 없어지는 데 딱 55년이 걸렸다. 남북정상회담 전에 우리가 대북방송을 중단하니까 북한도 바로 중단했다. 이번에도 우리가 철거하니까 북한도 확성기를 철거했다. 이심전심이다. 남과 북 모두 의지를 갖고 있다. 만약 확성기 방송을 단순히 중단만 했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시 틀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신뢰를 쌓을 수 없다.

모든 게 신뢰를 쌓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걸 중매결혼에 비유하고 싶다. 중매결혼은 신뢰가 있는 상태에서 하는 만남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매 역할을 잘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문제를 하나하나 돌파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확성기 철거도 그런 과정의 하나다.
지난해 말부터 일련의 흐름을 잘 봐야 한다. 기본 판 자체가 없는 신뢰를 새롭게 쌓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작은 일에 ‘잘못했네’, ‘틀렸네’라고 하면 안 된다.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큰 진전이 있겠는가. 지금 전체적인 국면은 남·북·미 최고지도자들이 톱다운(top-down, 위에서 아래로) 방식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동안 회담은 보톰업(bottom-up, 아래에서 위로) 방식으로 성사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이제 대화의 방식이 바뀌었다. 비핵화도 마찬가지다. 최고지도자들이 결단을 하고 큰 틀에서 일괄 타결해야 한다. 이행과 관련된 부분은 실무선에서 단계적으로 가되, 단계를 줄이고 보상은 행동 대 행동으로 가야 한다.

문 대통령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부터 빠르게 추진하자”고 한 발언과 같은 맥락인가?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왜 비핵화 관련한 날짜를 확정하지 못했느냐”, “종전선언을 이 수준밖에 하지 못했느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한꺼번에 다 할 수 있겠는가. 안 될 일이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꼴이다. 지금 상황을 비유하자면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기르고 숭늉을 끓이려고 불을 피우려는 단계다. 이제 막 첫 단계에 들어섰다.

올해 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내용도 합의했다.
한반도가 평화체제로 가려면 정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평화협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정전체제의 가닥을 잡고 가야 하니까, 그래서 종전선언이 필요하다. 제도적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선언문에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의 표현이 들어 있는데 결국 종전선언은 중국을 포함한 4자로 갈 수밖에 없다. 어차피 1953년 체제에 중국이 분명 들어 있다. 중국이 종전선언을 같이해야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데 안정감이 생긴다.
지금의 남·북·미, 나아가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 포함한 틀이 쭉 갈 것이다. 문 대통령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거다. 길잡이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모두 직설적이고 회담의 판을 주도하는 스타일이다. 반면 문 대통령은 신중하고 우직한 사람이다. 둘만 가면 깨질 수 있는데 문 대통령이 중간에 있다. 그래서 세 정상의 조합이 어울리는 거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서 ‘북핵’이라는 직접적 표현이 없다는 우려도 있는데?
판문점 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부분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이 포함된 거다. 판문점 선언에서 모든 걸 담을 수는 없다. 큰 틀에서 담았으니 이제 구체적인 부분은 북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 올가을 평양에서 개최되는데?
우리 예술단이 평양공연을 갔을 때 북한 예술단이 “가을에 봅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가을에 정상회담이 또 열릴 걸 예상했다. 가을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정례화에 접어든다고 본다. 정상 간 직통전화도 개설됐다. 이를 통해 앞으로는 남북 정상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편하게 함께 이야기하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다. 남북관계가 의례적인 걸 넘어 친근해지길 바란다. 개인적 소망은 1년에 네 번은 정상회담을 하면 좋겠다. 그게 어려우면 봄, 가을에 한 번씩 열리는 것도 괜찮다. 또는 8·15 광복절 경축행사를 판문점에서 하고 남북 정상이 참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의미 있는 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1년 내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관계 차원뿐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을 움직이게 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뜻은 베를린 평화 구상에도 나타났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이야기한 바 있다.

5~6월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시계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5월 9일 한·일·중 정상회의가 있었고, 5월 22일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된다. 6월에는 한러정상회담도 열린다. 북미정상회담에 앞서 북중 정상도 두 차례 만남을 가졌다.시진핑·아베·푸틴 세 정상은 링 밖에서 지켜보고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 링 밖의 플레이어들이 있어야 링 안의 트럼프·김정은 두 선수가 안정감 있게 갈 수 있다. 일부에서는 “남·북·미 셋만 가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럴 수 없다.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할 때 주변국을 빼고 갈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부분은 판이 한번 정리가 돼야 한다. 하나의 가닥이 잡히고 평화체제로 갈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에서 긍정적으로 큰 틀의 판이 잡히면 남북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미국은 유엔의 대북 제재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이 비핵화에 들어서면 제재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도보다리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도보다리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남·북·미 연쇄 정상회담 가능성도 커질 것 같은데?
북미정상회담은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3월 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당시 내정자)이 북한을 방문한 게 분수령이 됐다. 그다음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후 한미 정상 간 전화 통화도 75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모든 공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돌렸다. 한국 입장에서 중요한 건 평화다. “노벨평화상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는 한반도 평화만 가져오자”고 한 문 대통령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북미정상회담에서 비핵화가 어느 수준으로 합의될 수 있을까?
큰 틀에서 합의가 될 것이다. 최고지도자들의 합의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내용은 향후 실무회담을 통해 하나둘 맞춰가야 한다. 미국은 2020년 11월 대선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2022년 5월까지다. 그 안에 한반도 비핵화의 시안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럴 경우가 베스트다.

북한이 핵실험장 폐쇄를 대외에 공개한다는 뜻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유엔에 참가를 권했는데?
국제사회에 투명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좀 더 오픈 마인드(열린 자세)를 보여주려는 뜻이다. 2008년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때와는 다르다. 북한으로서는 중요한 의미다. 풍계리 핵시설 폐쇄에 유엔 산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오면 북한의 비핵화를 향한 첫 행동이 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도 유엔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북한도 유엔이 오는 걸 반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렇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판문점에서의 회담은 의미가 있다. 판문점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유엔사 관할 구역으로 북한이 세계를 상대하는 공간이라 할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은 대결과 전쟁의 공간에서 대화와 협력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전 세계에 냉전 해체 시작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그야말로 ‘한반도판 몰타 선언’이다. 1989년 미·소 최고지도자가 몰타에서 냉전 해체를 선언한 것처럼 말이다.
범정부 차원에서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상설조직체를 만들어야 한다. 청와대가 주도하고 통일부·외교부·국방부 등 관련 부처를 아우르는 종합 컨트롤타워가 조직돼 한반도 정세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구상을 주도한 대북 전문가다. 문재인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위원으로 참여했고 정책기획위원회 남북관계·통일소분과장을 맡아왔다. 현재 남북정상회담 전문가 자문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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