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명자 화가

<실경實景, 그 안에 인생의 신비를 담다>

인생의 현장에서 현장만을 그리는 작가

1. 세상의 풍경을 마음의 풍경으로 그리다

노명자 화가는 진실 앞에서 나체다. 그림은 사람을 닮는다. 사람과 그림은 일란성쌍둥이다. 솔직한 사람은 솔직한 그림을 그린다. 노명자 화가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림이 솔직하다. 마음이 투명해 거짓말을 모르는 화가다. 세상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 글이고, 세상을 옮겨놓은 것이 그림이다. 노명자 화가에게는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고운 인생을 갈무리 잘 하는 여인 같다. 하지만 노명자 화가의 인생에도 꽃이 피고 졌다. 고난이 피고 졌다. 그림에도 지문처럼 남아있다.

사람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눈물호수가 있다. 인생길에 지쳤을 때 쉬어가라고 신이 마련한 위로다. 아프고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 펑펑 울라고 마련한 공간이다. 눈물호수에서는 마음 놓고 울어도 좋다. 그곳에서 사람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가면 추억의 호수가 나온다. 추억은 신비해서 정지된 화면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영화처럼 젊은 날의 화면은 젊음 그대로다. 추억은 세월에 젖지 않고 나이에 물들지 않는다. 그곳은 현장이다. 젊은 날의 모습 그대로의 현장이다. 아직도 그곳에 서 있는 작가가 있다. 노명자 화가다. 생명의 현재 모습은 과거로 만들어졌다. 과거가 화석처럼 지금의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그대로의 노명자 화가의 모습은 극히 지적이고, 현명하며, 바른 길에 서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늘도 없고, 눈물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잘 익은 가을의 과일 같다.

<대추 한 알>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시가 있다. 노명자 화가의 인생은 시 속의 대추 같다. 먼저 감상해보자.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에도 인생이 있고 고난이 있다. 대추나무 한 그루에도 도전이 있고 실패가 있다. 심지어 벼락 맞아 죽을 때도 있다. 태풍으로 가지가 꺾일 수도 있다. 다 견뎌야 대추가 익어 붉어진다. 마찬 가지로 대추가 둥근 것도 모난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삭여야 둥글어진다. 보름달처럼 둥글어져서는 넉넉해진다. 노명자 화가의 인생이 그렇고 그림이 그렇다. 세상을 견디어 내고 맞이한 인생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하다. 그림에도 넉넉함이 그대로 들어있다.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이 그림에 전해진다.

노명자 화가는 현장만을 그리는 작가다. 현재 보고 있는 현장, 현재 살아있는 현장만을 고집하는 화가, 노명자다. 내가 직접 보고, 내가 직접 서 있고, 내가 직접 그려야 한다는 철학으로 화업을 일구어왔다. 인생 자체를 불타는 화재현장이라는 뜨거움으로 사는 화가다. 세상으로 나가 도전하기보다 내면의 뜨거움으로 살아가는 화가다. 자연에 도전하고, 극한 상황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망과 그리움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조용하지만 안으로 타는 열정이 있어 현재라는 시간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인생에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고, 인생 안에 뜨거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인생 안에 불 질러서 내부의 에너지로 삶을 꾸려온 화가다. 고생이라고는 해 본 것 같지 않은 외모와 인생이었지만 참고 견디는 인고의 여인으로 서양 미술에 몸을 담았다. 꾸준하고 일관된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일시적인 충동에너지가 아니라 조용한 혁명처럼 자신을 불태워서 화업을 일궈온 화가다.

▲ 정밀화의 품격을 높인 작품으로 구성과 세밀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 내 곁에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노명자 화가에게 현장은 바로 지금, 여기다. 현장성을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나무가 성장하는 지점을 생장점이라 한다. 나무는 온몸으로 일어서서 일생 동안 성장한다. 죽기 직전까지 성장한다. 노명자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업, 화업은 쉼 없고 거침없다.

우선 작품량이 놀랍다. 화실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시회를 몇 번 할 수 있는 양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 이번 작품전시회와 도록을 만들면서 200점 정도를 싣는데 싣지 못하는 작품이 훨씬 많아 안타까워 할 정도다. 열정이 나무처럼 일어서고, 열정이 마지막 날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날보다 더 강렬한 화가의 길을 예비하고 있다.

노명자 화가는 화가로의 외길을 걸었지만 화가로서 화폭에 옮긴 소재는 다양했다. 정물, 인물, 풍경, 누드데생 등으로 소재의 폭이 넓었다. 노명자 화가를 만나 놀란 것이 있다. 어느 화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점이다. 철저하게 그림은 현장에서 보고 그려야 한다는 당위를 가지고 있다. 현장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화가로서

당연하게 노명자 화가의 작품은 사실화로 일관되어 있다. 초初와 지志가 일관一貫되어 있다. 처음과 끝이 같기는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 안에도 바람이 불고, 사람의 마음 밖에도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끝없이 바람이 불어 처음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어렵다. 노명자 화가에게서 초지가 일관할 수 있는 것은 꾸준하고 변함없고 솔직한 면을 가져서다.

정물화는 사실화로 세밀하고 완벽할 만큼 묘사가 사진에 가깝다. 세밀화는 정밀한 붓놀림이 필요하고, 대상을 보는 눈이 예리해야 가능한 세계다. 물질이 가진 특성과 마음으로 빚는 구성 또한 완벽해야 도달할 수 있는 단계다.

한데 풍경화와 인물화는 사뭇 다르다. 순수 풍경화는 시시각각 변하는 대자연 앞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자연과 일치되어 자기가 그리고 싶은 풍광을 화폭에 담게 된다.

1982년부터 시작한 인물화작업은 모델을 두고 드로잉drawing하여 인체의 형태, 동세, 비례를 미리 관찰한 뒤 유화로 옮기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대학에서 세밀하게 그렸던 그래픽graphic 기법을 버리고 스투마토stumato기법을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졸업과 함께 결혼하여 타고난 예기와 끓어오르는 욕망을 누르고 화가의 길을 접었지만 늘 인간적인 책임감과 미술에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세 아들을 키운 뒤 38세가 되어 비로소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미국 산호세 대학에서 잠시 미술공부를 했다. 결혼 후 15년이라는 공백기가 오히려 동력이 되었다. 오히려 몰입과 집중이 되었다.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빠를 수가 있다. 목표는 화가로서의 완성이다. 목표를 향해 갈 때 빨리 도달하는 방법으로 우회축적이란 것이 있다. 맹금류인 매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매는 토끼를 사냥할 때 하늘 위에서 사냥감까지 직선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다른 원리를 이용한다.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해서 우회로를 이용한다. 목표가 정해지면 지상으로 수직낙하를 시작한다. 번지점프를 할 때처럼 수직낙하하면 무서운 속도로 가속된다. 낙하에너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몸을 살짝 틀어 지표면과 수평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모든 에너지를 모아서 단번에 사냥감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가 먹이감을 낚아챈다. 매는 반복된 사냥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빨리 먹이를 낚아채는 방법을 익혔다. 그것도 안전하면서 확실하게 먹잇감을 낚아채는 방법을 터득했다.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사냥의 기술이다.

물리학적으로 보아도 타당성 있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실험해 보았다. 30미터 거리에서 먹이감을 잡는 시간을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때 수직으로 날아갈 때 3.54초가 걸렸다. 수직낙하하다가 수평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이용했더니 3.27초로 오히려 짧았다. 거리가 더 길었음에도 시간이 짧았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돌아서라도 자신의 에너지를 최대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것이 우회축적(迂廻蓄積: Roundabout accumulation)이론이다.

누구나 빠른 길을 가고 싶어 한다. 직선보다 돌아서 가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우회축적이론을 설명한 것은 노명자 화가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거리상으로 멀어 보이는 굽은 길이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배려한 기간이 노명자 화가에게는 우회로일 수 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기에 더욱 몰입했고, 집중했다. 사랑하는 사람, 즉 가정과 시댁에 대해 시간과 열정을 투입한 기간에도 그림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수직낙하해서 가속도를 얻을 수 있었고, 그림을 위한 집념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우회했던 기간, 즉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냈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방향을 틀어 미술에 대한 목표를 향해 속도를 내는 순간 그림를 그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돌진할 수 있었다. 순탄하게 미술에 대해 손을 떼는 기간이 없었다면 화업 40년의 길을 걷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더 큰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에 있을 수도 있다. 너무 빠르고 직선만 바라다보면 오히려 더디 가는 경우가 생긴다.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느려 보이지만 더 큰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우회축적은 안정화의 길이었다. 길이 열릴 때까지 참고 기다려온 사람이 노명자다. 힘이 모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인내와 성실로 점철된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목표지점을 향해 직선길을 선택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한 사람이기도 했다. 견딤의 미학을 내재시킨 인내의 달인이었다.

3. 인생이 실생實生이었듯이 화업에서도 실경實景을 그리는 작가

그림 작업에도 인생을 살아온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음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 문자고, 마음을 그린 것이 그림이다. 노명자 화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인생 내내 실천하는 삶이었듯이 그림도 실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노명자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가감 없이 그리는 화가였다. 내가 살아온 그대로가 내 인생이듯이 내가 보고 있는 풍경 그대로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노명자 화가였다.

노명자 개인인생으로서의 삶처럼 화가로서의 화업도 존재에 대한 실존적인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화가 공동체에서의 개인적인 삶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삶과 화업이 다르지 않고,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다르지 않은 흔들림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이 노명자 화가다. 뿌리 깊은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다. 노명자 화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토대로 흔들림 없이 인생과 화가로서의 길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다.

1988년 창립한 한국인물작가회에서 30년 동안 부회장직을 맡고 있고, 1988년부터 출품해 온 한국풍경화가회에서는 2016년부터 임기 기간 동안 회장직을 맡아 봉사했다.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됨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화가에 대한 염원이 컸음에도 남편이 원하지 않는 일은 안 하고, 어린자식의 교육과 양육에 누가 될 것 같아서 그림을 접은 세월을 감내한 사람이었다. 그림도 인생을 그대로 닮아서 실경을 그리는 작가가 노명자 화가다. 노명자 화가가 사실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노명자 화가의 실증적인 인생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것만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 있다.

노명자 화가는 밖으로의 확대를 자제하고 안으로 방향을 틀어 내실 있는 삶을 선택했고, 먼 곳에 있는 사랑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사랑에 집중했다. 그리고 하나를 선택하면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지속하는 시종始終이 같은 인생이었다. 노명자 화가의 삶을 그린 듯한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보자.

 

장미는 뜨거운 심장을
회오리바람으로 말아 올려
중심에 꽃을 피운
사랑의 성전이다

생명현상 중 가장 목마른 기적, 사랑
비를 맞고 있지만 목마르다
바람의 몸을 입고 있어
너는 내 안에 있지만 그립다

사랑에 도도한 장미는 가시를 기른다
휘몰아치는 회오리의 중심에
한 사람만을
들이겠다는 은장도다

<장미 / 신광철>

노명자 화가는 자신의 인생처럼 인생에 은장도를 품고 사는 사람이다. 인생에 치열해서 비수를 자신에게 들이 대 인내와 절제로 살아온 화가다. 상대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 대 자신의 인생에 확고한 삶의 원칙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림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상 그대로를 그리되 화면 구성을 위해 최소한으로 자연을 재구성해서 대상을 그린다. 자연과의 친화와 자연과의 동행이 아름다운 작가가 노명자 화가다. 아름다운 인생과 실존적인 치열함을 추구하는 노명자 화가의 앞날을 기대한다.

글, 작가 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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