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법화원을 제외하고도 엔닌의 일기에는 신라인들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보면 장사하는 사람, 문인, 관리, 그리고 해상무역을 하는 사람, 역어 등 재당 신라인의 활동내용이 보인다. 역어는 통역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통역사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어에 능한 역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의 왕래가 잦은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이 많은 곳은 구당신라소뿐만이 아니라 신라관,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들 신라인의 주체는 누구인가.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이들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 방황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해버린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착할 곳도 없었다. 울분도 삭히고, 눈물도 삭히고 살아야했다. 살아내야 했다. 상처 받은 이들에게 가해진 것은 이로가 아니라 낙망이었다.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하거나 떠돌다가 후일 같은 패망국가인 고구려의 이정기집단에 의해 통합된다. 이들은 55년을 뭉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당의 세력에 밀려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당의 소속으로 출정했던 장보고가 나타난다. 군중소장이었던 장보고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장보고에 의해 다시 뭉친다. 독립된 나라로서가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끈끈한 유대관계로 만난다.

타고난 열정과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진 이들은 다시 태어난다. 장보고에 의해 다시 일어서게 된다. 기다려왔던 세상으로 이들은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바다로, 세계로 보다 넓은 세상으로 달려 나갔다. 그 앞에는 장보고가 있었다. 뛰어난 지도력과 모험심으로 장보고는 바다를 장악해갔다. 바다로 가는 길에 이들 신라인 들이, 엄격히 말하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인들로 이루어진 유민들이 한을 삭히며 바다를 점령해나갔다. 바다의 경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장보고의 출현은 한민족의 보금자리를 다시 찾는 일이었다. 피를 확인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 다른 입장으로 당나라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장보고에 의해 통합되고 갈 길을 찾아갔다. 이것이 바로 청해진의 설진이었다.

신라관은 당조정에서 설치하여 신라의 사절만은 전담하여 접대하는 일종의 국영호텔이다. 교통 요충지에 설치하여 사절단의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신라원은 신라의 교민들이 당나라 안에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사원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라원은 장보고가 설립한 적산의 법화원이다. 승려들이 모두 신라인이기 때문에 전산 신라원 또는 그냥 신라원이라고 했다. 엔닌일기에 경을 읽는 소리가 신라말소리로 당의 소리와는 다르다고 적고 있다. 신라원은 바다를 왕래하는 여객을 접대하는 업무를 병행했다. 적산 법화원은 장보고 선대의 중간기항지였으며 보급과 연락을 함께 담당한 종합적 업무를 수행한 다목적 사원이었다.

신라방은 당의 도시에서 재당신라인이 집단거주하게 한 구역을 말한다. 방은 고대 시내 거민구의 통칭이다. “양경 및 주현의 성곽 내는 방으로 나누고, 교외는 촌으로 한다”는 기록과 “읍에서는 방이라 하고 전야에서는 촌이라 한다”는 것으로 볼 때 도시에 해당하는 곳에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인들의 분포상황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널리 분포되어있음을 보게 된다. 남쪽의 명주에서 북으로는 등주에 이르기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이른 해안선을 끼고 자리 잡고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곳곳에서 신라인들을 만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는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초주의 신라인의 공동거주지인 신라방을 관리하는 관원의 직급은 총관이었다. 총관직이 어떤 직책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신라방의 규모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육전에 의하면 “오천인치총관일인五千人置總官一人” 이라고 되어있다. 오천 명을 관리하는 직책이 총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때의 비방건제에 다르면 “백호면 리里를 형성하고, 다섯 개 리는 향鄕으로 형성하고, 두 곳의 수도와 주현의 관내구역은 방坊으로 나누고, 교외는 촌村으로 나눈다” 고 되어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저작권자 © HKBC환경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