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행정단위가 지방행정제도의 기초단위가 리라면 이것을 자연적으로 형성된 부락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에 단위가 향으로 우리의 경우 면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 위에 방과 촌이 있는 셈이므로 상당한 규모를 가진 행정단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든 초주지역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수가 오천 명 정도로 이를 관할하는 총관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견당사절단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초주에 들러서 “바닷길에 익숙한 암해자暗海者 60 여명을 고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바닷길을 안내하는 사람인 암해자는 지금으로 보면 해기사라고 할 수 있다. 해기사 60 여명을 한 번에 고용할 수 있다면 암해자란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숙련된 암해자가 있는 만큼 더 많은 선원과 선박을 수리하거나 선박운항업을 하는 신라인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볼 대 산동반도와 강초지구에 이르는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역량은 이렇듯 넓고도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인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통합에 있었다. 장보고도 신라로부터 이탈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신라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에는 한계를 느껴 당나라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당나라에 정착하고 있는 신라인들의 마음과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동료의식과 민족의식이 그의 가슴에 불이 붙었다.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잡혀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장보고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과 더불어 장보고 자신도 신라에서 해적을 만났다면 같은 입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정착한 곳은 척박한 곳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적은 글을 보면 생각보다 훨씬 참혹하고 황량한 곳이었음을 보게 된다.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절에 당나라를 방문한 엔닌의 일기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해주에서 등주로 가는 길은 가히 다닐 만한 곳이 못된다. 들판의 길은 좁고 초목이 덮여 있으며, 한 걸음만 나아가도 진흙에 빠져 수없이 길을 잃는다. 만약 길 안내원이 없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 황량한 들을 나서면 산이요, 산을 나서면 황량한 들판이다. 산지에 들어가면 하루에 백번이나 산을 넘어야 하고, 백번이나 물을 건너야 한다. 거친 들판에 들어서면 나무가 울창하고, 풀은 빽빽하여 조금밖에 나아갈 수가 없었으며 앞의 것을 보는 것조차 곤란하였다. 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도중의 들이나 현의 마을은 들판 가운데 솟은 하나의 언덕처럼 보였다. 산간 마을 주민들은 껄끄럽고 딱딱한 음식을 먹으며, 소금과 차와 조밥을 먹는데, 삼켜도 넘어가지 않으며 마신즉 가슴에 통증이 온다. 산촌의 풍속에는 음식을 익혀 먹은 적이 없다. … 북쪽으로 천삼백 리를 가는데 모두 산과 들이다.

비교적 장황하게 인용했지만 장보고가 활동하던 그 당시에도 산동반도와 양자강 어구에 이르는 지역에는 사람이 그리 많이 정착하고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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