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신라인들을 규합해 최초의 다국적 기업을 일구어낸 장보고

-장보고를 만든 사람들은 재당신라인의 하층민이었다.

신라인들은 탁월한 상업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척박한 곳에서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애초에 땅에 기대어 살았던 신라가 아니었다. 신라처럼 정착은 어려웠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든, 해적에 잡혀와 살게 된 땅이었든, 흙을 일구고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정착된 생활방식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에 손을 댔다. 당나라에서 삶을 일군 사람들은 다양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출신 유민이나 견당사절단을 따라서 들어온 사람들은 상류층이었다. 이들이 종사한 직업은 관리와 승려 같은 직업이었다. 유학을 온 사람들도 많았다. 또 하나는 당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하층민이었다. 이들이 장보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상업을 비롯한 운송업, 선원, 조선공, 제염업 등이었다. 일부는 농업에도 종사했다. 이들 하층민 중 성공한 사람들은 재당신라인의 공동거주지역에서 총관, 구당신라소 압아勾唐新羅所 押衙, 역어 등이었다. 역어의 역할은 다양했다. 통역이 주임무였지만 관청과의 교섭업무, 교통편을 수배하고, 서신전달업무와 여행자의 숙식업무를 겸하기도 했다. 이들이 동북아 물류교류의 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파자역할도 했다. 재당 신라인 관리기구의 책임자 또는 주요직책에 기용되기도 했다.

구당신라소는 당나라 때 신라관련업무를 관장하는 지방기구를 말한다. 엔닌일기에 “평로군절도동십장 겸 등주제군사 압아 장영은 문등현계 신라인을 관할하였다”는 기술이 있다. 이로보아 구당신라소는 재당신라인 사무를 전담처리하는 기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압아는 절도사 휘하의 친위무관이며 친위병을 총괄하고, 절도사와 그의 관아를 경호하는 업무를 하며 지위는 절도사 다음이다. 이러한 사람이 장보고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앞서 대사라는 장보고의 직함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했듯이 이는 신라와 당나라간의 합의에 의한 정책적인 이유로 청해진은 태어났고, 장보고라는 걸출한 한 사람이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보고와 정년의 경우는 당나라에 입대한 군인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용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정식군인이 되어 입신을 꿈꾼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재당 신라인들은 바다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뛰어난 바다의 기능공들이었다. 엔닌일기를 살펴보면 그러한 자질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닷길에 익숙한 신라인 60여 명을 더 고용하여 각 선마다. 7명 혹은 6명 혹은 5명을 배치했다.

선대가 사수를 지날 때 제 일선의 수부와 초공이 하선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아 여기에 머문 채 더 전진할 수 없었다.

당나라와 일본의 왕래할 전문적인 바다 사람을 구하는데 신라인으로 60명이란 숫자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그들을 고용하여 각 선마다. 7명에서 5명까지를 배선시켜 안전운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배에 대한 기능의 숙련도를 알 수 있다. 제 일선에 타고 있던 수부와 초공이란 직책은 물의 전문가였을 것이다. 이들은 보다 전문적인 바닷길을 항해하는 길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다. 수부는 황해의 조수간만의 차를 확인하는 바닷물의 전문가였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에 의한 차이가 워낙 큰 곳이어서 때를 잘못 만나면 뻘에 갇히게 되거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서 운항해야 하는 선박이어서 바다를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초공이란 직책은 배의 항로를 잡아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신라인들이 이러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이들은 우선 상업과 수상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를 제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업과 선박수리업에도 손을 댔다. 엔닌일기에 이러한 언급이 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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