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황해를 품으려는 신라의 끝없는 욕망

-길을 여는 나라만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신라는 바다와 인연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 신라의 귀는 서쪽으로 열려있었다. 문명은 서쪽으로부터 들어왔다. 당연히 서쪽의 소식에 목말라했다. 가깝게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문화를 전수받았지만 중국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으려는 욕망이 컸다. 중국으로 가는 길은 닫혀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로 길이 막혀있었고, 바다를 동아서 가야 했다. 하지만 바다는 백제를 거쳐야 다다를 수 있었다. 근해가 아니면 항해가 어려운 닻배였다. 당연히 백제의 양해가 없이는 어려웠다. 모험을 하기에 바다는 거칠었다. 그리고 두려운 존재였다. 삼국 중 신라가 뒤쳐진 이유는 이러한 어려운 상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입장에서는 황해의 확보가 가장 큰 관심이었다.

신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험을 실시했다. 우의도 저버렸다. 그만큼 신라는 간절했다. 나라의 운명이 황해를 열고 못 열고에 달려있었다.

551년, 진흥왕 12년에 나제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의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신라가 차지해버린다 연합해서 빼앗은 땅을 일방적으로 차지하는 국제신의를 저버리는 일을 감행했다. 모험이었다. 2년 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루지역을 독차지해 버렸다. 동맹이었던 백제를 버렸다. 황해로의 길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생사가 그곳에 있었다. 야망을 드러내고 신의를 저린 결과로 신라는 황해로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이는 큼 모험이었다. 고구려는 물론 동맹이었던 백제마저 적으로 만드는 큰 모험이었다. 백제는 격분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백제의 성왕은 실패하고 만다. 적들에 둘러싸이는 상황을 초래하면서까지 황해로의 길을 고집한 것은 낙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문헌의 기록으로 확인이 된다. 진흥왕 이전 200여 년 동안에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모두 5차례에 불과했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고구려나 백제의 양해와 협조를 받거나 다른 나라 사신을 따라가야 하는 굴욕을 견뎌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있었다. 독립적인 국제관계를 가질 수 없는 약점을 가졌다. 치명적인 약점의 극복만이 국난으로부터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이라고 생각한 신라는 모험을 강행했다.

진흥왕대에 황해로의 길이 열리면서 신라의 대당외교와 교역은 활기를 띄게 된다. 신라가 한강 하루지역을 차지하고 길을 연 100년 동안에 중국으로의 사신은 43회나 된다. 엄청난 변화였다. 문화와 기술과 사람이 오가면서 신라는 활기를 찾게 된다. 대외외교를 하면서 이웃나라인 고구려와 백제에게 허락을 맡고 통과해야만 하는 수모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를 수행하게 되었다. 진흥왕이 한강 하루지역을 점령하고 황해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은 곳은 당은포였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이 있던 당항진이었다.

당은포는 항구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중국과의 왕래에 좋은 위치였다.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중국과의 왕래가 잦아짐에 따라 대당외교에 활기를 띌 수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를 분리할 수 있었다. 한강일대가 신라의 국토로 편입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교통로가 신라에 의해 차단되었다. 안보 군사적인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실익도 컸다. 문무왕은 선부서를 격상시켜 선부로 하고, 일급중앙 관서로 만들었다. 바다를 장악해야만 국가압조는 물론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조치였다. 새로이 바다를 장악한 신라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제해권을 가진 신라는 삼국의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연재 소설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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