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장보고에 의해 들여온 이 도자기 생산기술은 장보고의 사망과 더불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많이 흐른 고려 때에 강진 땅에서 다시 가마에 불이 지펴지지만 오랜 기간 그 기술은 사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주요에서 생산된 것과 강진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파편이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곳이 바로 강진군의 대구면과 칠량면이다. 이곳은 한국 도자기의 성지가 된 곳이다. 장보고가 이룩해 놓은 첨단의 기술단지는 이렇게 남도의 강진에서 발화되었다. 신라가 경제부국으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청해진의 몰락과 함께 도자기 기술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고려조에 들어서야 다시 강진 땅에서 도자기 기술은 꽃을 피운다. 신라 내에서의 유통은 물론 수출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논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일본의 길강원석吉岡元祏이라는 학자가 쓴 <고려청자의 출현>이란 논문이다.

전년 (1984년) 필자가 행한 유적에서 500점이 넘는 월주요청자가 출토되었다. 이들의 파편 가운데 고려청자와 닮은 것이 있어, 경도대학에 의뢰하여 태토분석을 행하였는데, 한국의 대구면 용운리의 사목고대청자요지와 동질의 청자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장보고의 청해진에서 운영한 가마에서 생산한 도자기가 일본에까지 수출품으로 건너갔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강진의 대구면 용운리에서 구은 태토와 같은 것이 7군데에서 발견되었음도 밝혀졌다.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 수출품 중 주요물품으로 거래했음을 보여준다.

청해진은 군사적인 이유로 설진되어 황해를 같이 하는 주변국들과 무역을 실시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청해진을 생산 기지화했다. 바다를 매개로 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생산을 직접함으로써 물량을 확보하기 쉬웠다. 또한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무역기지에서 생산기지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청해진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재정은 더욱 튼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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