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군 집안이 대자동에 정착하게 된 배경

그럼 대자골짜기에 한번 들어 가보자.
대자동에 들어서서 노인정이 있는 경안길로 가다보면 3개의 유명한 묘가 있는데 제일 안쪽에 위치한 것이 성녕대군의 묘다.
*[참고:안내표지판에 적혀있는 ‘성령대군’은 ‘성녕대군’의 잘못된 표기로 수정되어야 함. 寧은 편안할'녕'으로 령이 아님. 따라서 앞 글자가 받침이 있는 경우 그대로 '녕'으로 발음하고 효령대군처럼 없는 경우는 령으로 표기해도 무방함. *올바른 표기법: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성녕대군 사당을 지나 좁은 나무 사잇길로 올라가면 성녕대군과 그 양자 (효령대군의 자손) 원천군의 묘가 나온다. 그 앞서 최영장군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고 유치원 옆길로 가면 언덕 위 가파른 사초지가 형성된 경안군의 묘와 아래에 있는 임창군, 임성군의 묘를 만나게 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곳은 왕자 경안군 집안이다. 경안군 집안이 이곳 대자사터에 정착하게 된 경위에 대해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일말을 추측하여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로는 경안군이 효종10년(前봉림대군) 경안군에 복작시킬 때 제택과 의복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 때 정착한 곳이 현재의 대자사터일 가능성이 높다.
고종 9년 승정원일기에서 양녕대군의 16대 사손(祀孫)인 이승보(숭례문 개축공사 책임자), 소현세자의 사손인 이필용과의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사우(祠宇)는 시일을 기다렸다가 봄에 영건(營建)할 것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사옥(祠屋)은 비록 전일에 지은 것입니다만 지붕을 기와로 덮지 않았고 또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 목재가 지금 모두 썩어 문드러져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응당 새로 지어야 합니다. 사손(祀孫)이 제사를 주관하는 청사(廳舍) 또한 매우 협소하니, 고쳐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마른 땅을 사서 향불 피우는 비용을 마련하는 데에 이용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옛 터에 그대로 짓는다는 것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장차 옛 터를 그대로 하여 다시 짓는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의 묘소가 대자동(大慈洞)에 있는데, 이곳은 몇 리의 거리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서울과는 40리의 거리이고 본 읍과는 5리의 거리입니다. 성녕이 죽은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이 몸소 그 묘소에 임하셨을 때에 ‘자애로움이 크다.’ 하여, 그 동리를 대자동(大慈洞)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이 죽은 것은 태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에 있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녕은 겨우 14살에 죽었으니, 바로 태종이 재위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 때문에 대자동으로 이름한 것이로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녕의 묘소는 대자동에 있고 경안군(慶安君)의 묘소는 그 산등성이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똑같은 장소인데 사패(賜牌)한 땅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당초에 틀림없이 사패한 땅일 터인데, 지금은 서로 매장하고 있습니다. 연석에 오른 유신(儒臣)은 바로 경안군의 후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가의 정의상 진실로 똑같은 지역의 산이 매우 좋을 것이다. 경안군의 사우는 산 아래에 있는가? 고양(高陽)읍에 있는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일찍이 산 아래의 제청(祭廳)에 봉안했습니다만 제청이 무너졌습니다. 신이 사손(祀孫)이기 때문에 옮겨서 신의 집에 봉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선군(慶善君)은 일찍이 봉작했다. 경완군(慶完君)이 이번에 봉작할 대상인가?” 하니, 이필용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억울한 일이 있었다. 그의 자손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에 사는 사람이 10가구도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리도 적단 말인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경안(慶安)ㆍ임창(臨昌)ㆍ밀풍(密豐) 삼군(三君)이 잇달아 혹독한 화를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숫자가 적은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9년)
이 대화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첫 째는 고종 때 시호를 받지 못한 대군, 왕자군, 공주에게 대거 시호를 하사하는 은전을 고종 8년부터 대거 행하게 되었는데 소현세자의 큰 아들인 경선군과 유배에서 살아남은 경안군은 효종 때 시호를 이미 받았지만 둘째 왕자 석린 만은 고종 때 이르러서야 시호를 받게 된다.
*[참고: "소현세자의 1남 이백(이석철)은 경선군으로 증하고, 3남 이회(이석견)는 경안군으로 하라. 그리고 1녀에게는 경숙군주를 증하고, 2녀는 경녕군주로, 3녀는 경순군주로 하라.“(조선왕조실록 효종10년 1659년 윤3월)] 공주는 정비, 옹주는 후궁의 딸을 말함이고 군주는 왕세자의 정실에서 태어난 딸을 말함. 즉 남아는 왕자君이고 여아는 郡主가 된다.

글: 소창박물관 운영자 차문성(http://socha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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