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이 1871년 신미년에 내려진 후에 무분별하게 남설(濫設), 첩설(疊設)된 1,700여개나 되는 서원중 불과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강제로 철거된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당시 서원을 존치할 때의 원칙은 “배향하는 제현 및 충절과 대의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현판을 떼어 헐어내고 위패는 땅에 묻게 했다. 서원의 대규모 철폐는 영조 때도 있었지만 고종이 즉위한 이후 서원이나 고을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당(鄕賢祠)을 사사로이 세워 당쟁과 부패의 온상이 됨은 물론 서원을 빙자하여 백성에 폐해를 끼치는 것이 점차 극심해져 갔다. 벼룩을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지만 당시 왕권의 강화와 조선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볼 때 서원철폐라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47개 서원은 어떻게 선정된 것일까?
미사액서원의 철폐는 물론 사액서원일지라도 충절과 대의를 지닌 한 곳만 존속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해 결국 서원 26곳, 사우 21곳이 남게 되지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어느 곳에도 선별의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서원철폐령이 시행되기까지 불과 15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를 제대로 검토하기는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지역과 배향인을 안배한 것을 보면 사전에 충분히 정지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주에서는 성수침과 성혼, 성수종, 백인걸을 배향한 파산서원(坡山書院) 하나만 살아남고 자운서원을 비롯한 다른 서원은 철폐되는데 이는 황해도 백천의 문회서원이 율곡 이이를 먼저 배향했고 파산서원과 지역적으로 겹치기 때문이다. 파산서원의 뒤로는 과거 울창한 송림으로 덮힌 낮지만 가파른 무정산이 있고, 앞으로는 늘노천 계곡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파산서원을 보면 사액서원과 우계 성혼이란 도학자의 명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사액서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전답과 서원노비, 서책 등이 지급되어 면세전만 3결의 재정혜택을 받기 때문에 건축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텐데 지금의 모습에선 천혜의 강학, 서고의 역할을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의 파산서원은 홍살문에서 일직선상에 파산서원이란 현판이 붙은 사당(1966년 6칸 건물 중건)이 있고, 그 좌측 편에 찰륜당(察倫堂)(1976년 8칸 건립)이란 강당이 있다. 그 외 관리인이 거주하는 재직사와 찰륜당 뒤편에 경현당이란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사당은 예전의 주춧돌 위에 복원되어 있지만 찰륜당이란 강당은 건물이 폐쇄적으로 만들어져 강당의 본새가 나지 않는다.
47개 서원만 존치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했다는 것은 서원의 건축구조적인 면도 고려가 되었을 터인데 현재의 파산서원은 너무 초라하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파산서원의 ‘안내문’이나 『파주군지』(1995), 『파주의 향교와 서원』(2004)을 아무리 살펴봐도 건물의 구조와 배치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광해군 때 재건했다가 6.25때 다시 불에 타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 일치된 내용이다. 그런데 파산서원을 들린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홍살문에서 일직선상에 있는 사당이 불에 탄 고목의 느티나무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다. 필자 역시 이런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갖던 차에 두개의 기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림 ) 1933년 10월 1일 동아일보 기사 사진 / 현재 파산서원의 모습
하나는 1931년 동아일보의 기사인데, 파산서원의 노비로 있던 김정환이란 사람이 1928년에 파산서원의 독서실 일부를 불태우고 도망을 갔다는 기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파산서원의 노비집안인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10년 만에 돌아와 ‘늘노리 농민조합’을 조직한 후 봉건적 체제라 여긴 파산서원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당시 2천여 권의 문집 중 100여권을 태웠다고 기사에 나와 있어 서원 건물이 이때 거의 전소가 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얼마 전 또 다른 기사를 접했다. 1933년 10월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파산서원이 근자에 유명하게 된 데에는 개성공산당을 조직한 김정환이 파산서원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이 기사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삽화로 실린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이 사진에는 당시 파산서원의 전경이 모두 나와 있다. 사진을 보면, 파산서원이 제향공간 중심의 서원이라는 일설을 일축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홍살문과의 일직선상에 있는 중심건물은 사당건물이 아니라 강당건물이란 점이 지금의 건물배치와 상이한 점이다. 홍살문(紅箭)과의 일직선상에 있는 솟을대문(外三門)을 지나면 강학공간의 중심인 팔작지붕을 한 강당(察倫堂)이 있고, 그 좌측에 서재(西齋) 우측에 동재(東齋)가 보인다. 여기서 우측을 보면,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해 사당(祠堂)에 이르게 된다. 사당은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사당은 위계가 높은 별도의 공간으로 기단이 다른 건물에 비해 높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재(西齋)의 뒤편에는 또 다른 건물이 하나 보이고, 이 건물과 맨 좌측의 큰 건물을 연결하는 지붕의 윗면이 보인다. 좌측의 큰 건물 앞에는 어렴풋이 사람이 보여 이 건물의 용도는 누각인 것으로 생각된다. 즉 누각을 제외한 나머지 강당과 동서재가 동일한 기단에 놓여있고, 약간 높은 기단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로 전체적으로 좌당우사(左堂右祠)형의 건물배치라 볼 수 있다. 기사의 내용에 의하면, 독서실과 장서각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 불에 일부가 타 버려 건물 전경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지금의 홍살문의 위치는 사당과의 일직선상에 있지만, 사진에 의하면 강당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것이 맞다고 판단된다. 앞서 느티나무가 사당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사진에 의하면 사당의 대문은 서원의 안에서 이용하는 내삼문이므로 주출입문과는 상관이 없어 느티나무의 유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당은 현재 띠살문이 있는 폐쇄형으로 되어 있지만 사진에는 건물 앞 기단의 공간이 넓어 열주가 나와 있는 형태로 판단되고, 누각 앞 연지와 어울려 들어열개 분합문이 달려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현단의 비각(1988년 건립)이 강학공간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파주의 향교와 서원』에 청계정(淸溪亭)이 있었다고 하므로 파산서원은 결코 남도의 병산서원이나 옥산서원 같은 큰 규모의 서원건축 못지않게 경기북부의 전형적인 건축배치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한 장의 사진이 가지는 진실이 때로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기존에 제향공간이 중심이던 서원의 용도를 일거에 강학공간의 서원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다. 우계선생의 실용적인 학문의 깊이와 쓰임새를 고려할 때 그를 따르는 문도 역시 자연에 순응하고 현실감 있는 건축배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가 가로로 놓여 마치 마음 ‘心’을 닮아 있다. 기묘, 을사 양대 사화에 소인배에게 굽신거리기 보다는 산림에 은거하여 후학들에게 도학을 펼치고자 했던 그의 뜻이 이곳의 건축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우계기념관과 더불어 파산서원 역시 10동에 달하는 건물이 원형 복원되어 그의 뜻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전해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한 줄의 글과 한 장의 사진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믿으며 이 사진을 찍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 함께 하신 분: 방복순 파주시 문화관광해설사, 도움주신 분: 김영애 관광공사 생태해설사
(글: 차문성 sochang1@naver.com)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이 1871년 신미년에 내려진 후에 무분별하게 남설(濫設), 첩설(疊設)된 1,700여개나 되는 서원중 불과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강제로 철거된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당시 서원을 존치할 때의 원칙은 “배향하는 제현 및 충절과 대의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현판을 떼어 헐어내고 위패는 땅에 묻게 했다. 서원의 대규모 철폐는 영조 때도 있었지만 고종이 즉위한 이후 서원이나 고을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당(鄕賢祠)을 사사로이 세워 당쟁과 부패의 온상이 됨은 물론 서원을 빙자하여 백성에 폐해를 끼치는 것이 점차 극심해져 갔다. 벼룩을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지만 당시 왕권의 강화와 조선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볼 때 서원철폐라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47개 서원은 어떻게 선정된 것일까?
미사액서원의 철폐는 물론 사액서원일지라도 충절과 대의를 지닌 한 곳만 존속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해 결국 서원 26곳, 사우 21곳이 남게 되지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어느 곳에도 선별의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서원철폐령이 시행되기까지 불과 15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를 제대로 검토하기는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지역과 배향인을 안배한 것을 보면 사전에 충분히 정지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주에서는 성수침과 성혼, 성수종, 백인걸을 배향한 파산서원(坡山書院) 하나만 살아남고 자운서원을 비롯한 다른 서원은 철폐되는데 이는 황해도 백천의 문회서원이 율곡 이이를 먼저 배향했고 파산서원과 지역적으로 겹치기 때문이다. 파산서원의 뒤로는 과거 울창한 송림으로 덮힌 낮지만 가파른 무정산이 있고, 앞으로는 늘노천 계곡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파산서원을 보면 사액서원과 우계 성혼이란 도학자의 명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사액서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전답과 서원노비, 서책 등이 지급되어 면세전만 3결의 재정혜택을 받기 때문에 건축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텐데 지금의 모습에선 천혜의 강학, 서고의 역할을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의 파산서원은 홍살문에서 일직선상에 파산서원이란 현판이 붙은 사당(1966년 6칸 건물 중건)이 있고, 그 좌측 편에 찰륜당(察倫堂)(1976년 8칸 건립)이란 강당이 있다. 그 외 관리인이 거주하는 재직사와 찰륜당 뒤편에 경현당이란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사당은 예전의 주춧돌 위에 복원되어 있지만 찰륜당이란 강당은 건물이 폐쇄적으로 만들어져 강당의 본새가 나지 않는다.
47개 서원만 존치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했다는 것은 서원의 건축구조적인 면도 고려가 되었을 터인데 현재의 파산서원은 너무 초라하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파산서원의 ‘안내문’이나 『파주군지』(1995), 『파주의 향교와 서원』(2004)을 아무리 살펴봐도 건물의 구조와 배치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광해군 때 재건했다가 6.25때 다시 불에 타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 일치된 내용이다. 그런데 파산서원을 들린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홍살문에서 일직선상에 있는 사당이 불에 탄 고목의 느티나무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다. 필자 역시 이런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갖던 차에 두개의 기사를 확인하게 된다.
하나는 1931년 동아일보의 기사인데, 파산서원의 노비로 있던 김정환이란 사람이 1928년에 파산서원의 독서실 일부를 불태우고 도망을 갔다는 기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파산서원의 노비집안인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10년 만에 돌아와 ‘늘노리 농민조합’을 조직한 후 봉건적 체제라 여긴 파산서원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당시 2천여 권의 문집 중 100여권을 태웠다고 기사에 나와 있어 서원 건물이 이때 거의 전소가 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얼마 전 또 다른 기사를 접했다. 1933년 10월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파산서원이 근자에 유명하게 된 데에는 개성공산당을 조직한 김정환이 파산서원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이 기사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삽화로 실린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이 사진에는 당시 파산서원의 전경이 모두 나와 있다. 사진을 보면, 파산서원이 제향공간 중심의 서원이라는 일설을 일축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홍살문과의 일직선상에 있는 중심건물은 사당건물이 아니라 강당건물이란 점이 지금의 건물배치와 상이한 점이다. 홍살문(紅箭)과의 일직선상에 있는 솟을대문(外三門)을 지나면 강학공간의 중심인 팔작지붕을 한 강당(察倫堂)이 있고, 그 좌측에 서재(西齋) 우측에 동재(東齋)가 보인다. 여기서 우측을 보면,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해 사당(祠堂)에 이르게 된다. 사당은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사당은 위계가 높은 별도의 공간으로 기단이 다른 건물에 비해 높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재(西齋)의 뒤편에는 또 다른 건물이 하나 보이고, 이 건물과 맨 좌측의 큰 건물을 연결하는 지붕의 윗면이 보인다. 좌측의 큰 건물 앞에는 어렴풋이 사람이 보여 이 건물의 용도는 누각인 것으로 생각된다. 즉 누각을 제외한 나머지 강당과 동서재가 동일한 기단에 놓여있고, 약간 높은 기단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로 전체적으로 좌당우사(左堂右祠)형의 건물배치라 볼 수 있다. 기사의 내용에 의하면, 독서실과 장서각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 불에 일부가 타 버려 건물 전경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지금의 홍살문의 위치는 사당과의 일직선상에 있지만, 사진에 의하면 강당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것이 맞다고 판단된다. 앞서 느티나무가 사당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사진에 의하면 사당의 대문은 서원의 안에서 이용하는 내삼문이므로 주출입문과는 상관이 없어 느티나무의 유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당은 현재 띠살문이 있는 폐쇄형으로 되어 있지만 사진에는 건물 앞 기단의 공간이 넓어 열주가 나와 있는 형태로 판단되고, 누각 앞 연지와 어울려 들어열개 분합문이 달려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현단의 비각(1988년 건립)이 강학공간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파주의 향교와 서원』에 청계정(淸溪亭)이 있었다고 하므로 파산서원은 결코 남도의 병산서원이나 옥산서원 같은 큰 규모의 서원건축 못지않게 경기북부의 전형적인 건축배치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한 장의 사진이 가지는 진실이 때로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기존에 제향공간이 중심이던 서원의 용도를 일거에 강학공간의 서원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다. 우계선생의 실용적인 학문의 깊이와 쓰임새를 고려할 때 그를 따르는 문도 역시 자연에 순응하고 현실감 있는 건축배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가 가로로 놓여 마치 마음 ‘心’을 닮아 있다. 기묘, 을사 양대 사화에 소인배에게 굽신거리기 보다는 산림에 은거하여 후학들에게 도학을 펼치고자 했던 그의 뜻이 이곳의 건축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우계기념관과 더불어 파산서원 역시 10동에 달하는 건물이 원형 복원되어 그의 뜻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전해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한 줄의 글과 한 장의 사진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믿으며 이 사진을 찍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 함께 하신 분: 방복순 파주시 문화관광해설사, 도움주신 분: 김영애 관광공사 생태해설사
(글: 차문성 sochang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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