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런 '계단형 하마석'은 명나라 때도 일부 보이긴 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을 가장 많이 이용한 청나라에서 큰 유행을 했다고 한다. 청을 오간 연행사들은 당연히 그 하마석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것을 처음 도입한 것이 장릉 재실의 하마석임을 추측할 수 있다.
청나라에서는 하마석(下馬石)이란 말 대신 상마석(上馬石)이라 부른다. 생각해 보면, '계단형 하마석'은 '사각형 하마석'과 달리 말에서 내릴 때도 유용하지만 탈 때 더욱 편리하다. 누군가 밑에서 받쳐주어야 오르고 내릴 수 있다는 것은 한 명이 할 일을 두 명이 하는 것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외바퀴 수레가마인 초헌을 사람이 잡지 않으면 넘어지는 비효율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 비록 다듬은 돌에 불과하지만 '계단형 하마석'은 다른 석물과 달리 당시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한 사고변화의 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는 데 공감이 간다. 그럼 과연 인조 (新)장릉이 처음일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하마석의 기록이 제법 나오지만 그 형태의 특이성에 대한 말은 이것이 유일하다. 42릉 2묘(연산군, 광해군), 13원을 비롯한 수많은 능원의 재실에도 '계단형 하마석'(ㄴ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영조 25년 장릉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개연성을 높여준다. 영조의 사친을 모신 소령원의 제청에서는 도설에 이미 표시가 있지만 그 형태는 계단형인 'ㄴ'형이 아니라 네모난 ‘ㅁ‘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영조 1년 만들어진 사친의 사당인 숙빈묘(육상궁, 칠궁)의 계단형 하마석은 1749년 이후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920년대 제작된 조선고적도보에 ㄴ형 하마석은 계단처럼 놓인 것이 아니라 계단을 앞뒤로 바꿔 놓은 형태로 높은 단이 바깥을 향해 놓여있다. 계단이 여러 개 있을 때는 임금이 사용하는 '어계'(御階) 바로 앞 우측에 '계단형'(ㄴ형)하마석이 놓여있다. 현재 수정전에는 계단 앞이 아니라 옆에 놓여있는데 이것은 용도상 수정되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파주 장릉 하마석 발견은 기존 비정형과 사각형 형태에서 'ㄴ'형으로 바뀐 최초의 사례가 된다고 한다. 즉 칠궁, 연경당 등에 남아있는 ㄴ 형 하마석은 장릉 재실에 만들어진 하마석을 모방해 만들은 것이다. 연행사들에 의해 도입되었을 이 하마석은 비록 다듬은 돌에 불과하지만 형식과 관행을 뛰어넘어 효율을 추구하는 일종의 변화라일 것이다. 실제로 장릉의 병풍석에 새겨진 화문에는 조선 후기의 실학적 요소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추후 개방이 계획된 장릉은 죽은 자만의 공간이 아닌 인조와 영조의 생생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공간으로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글쓴이: 차문성
   

그러나 왕실의 경우는 궁궐 바깥이 아니라 궁궐 안에 설치되었다. 즉 "대소인원계하마"란 하마비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ㄴ'형 하마석은, 경복궁의 수정전, 창덕궁 낙선재, 연경당 그리고 칠궁처럼 궁궐과 길례를 행하는 곳에 설치되었다. 칠궁의 것은 옆에 화문(花紋)이 새겨졌지만 연경당과 낙선재에는 동일한 형태지만 문양이 없는 하마석이다. 이는 사가(私家)를 본 따 만든 집인 만큼 문양을 새기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릉 재실의 하마석도 연경당의 것처럼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지만 재실에서 발견된 최초의 하마석이다. 만약 능원 재실이 왕이 직접 치제하는 경우를 고려해 하마석을 만들었다면 장릉 외에도 하마석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서 그는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와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를 찾아보았지만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승정원일기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게 된다. "出駕敎 上曰, 齋室大門內有一石, 而似是下馬石, 問之"(승정원일기: 영조25년 2월10일 장릉재실)즉 장릉재실에서 임금이 익선관과 참포, 오서대를 갖추고 능을 봉심할 때, 가마로 나가 말하기를 "재실 대문 안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돌(의 용도가)이 하마석인가?"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왕실에서 하마석을 사용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ㄴ형 하마석은 이때가 처음일거라고 추정되는 글이다. 왕실 상장례를 가장 많이 행한 영조가 그 형태를 묻는다는 것은 당연히 처음 본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하마석은 인렬왕후 능이 운천리에 조성된 1636년도 아니고, 인조의 천릉이 이뤄진 1731년(영조7)도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영조25년인 1749년 2월10일에는 파주에 있는 장릉에 들러 사친의 묘소가 있는 소령원에서 유숙할 예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천장을 지시한 장릉과 사친의 묘소인 소령원의 방문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때 그 누군가가 장릉(長陵)에 독특한 '하마석'을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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